유물 보존처리 전문가 “엉덩이 찢어진 치마, 형태 잡는데만 석 달”

동아일보
동아일보2021-07-16 12: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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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간의 보존 처리를 거친 뒤 재탄생한 활옷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작업대 위에 펼쳐진 하얀 종이를 걷어내자 푸른색 철릭이 나타났다. 철릭은 조선시대 왕과 문무백관이 군사의례 시 입은 옷. 저고리와 치마를 연결한 형태로 치마에 주름이 많은 게 특징이다.

“치마 엉덩이 부분이 다 찢어져서 너덜너덜했어요. 훼손이 심해 원래 형태를 잡는 데만 3개월 가까이 걸렸죠.” 12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의 서화·직물 보존처리실. 안지윤 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가 철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날 살펴본 철릭은 제멋대로 나풀대던 천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은 상태였다. 안 연구사를 비롯한 직물 보존처리 전문가들이 지난해 말부터 찢어진 수십 군데를 기존 주름 방향에 맞춰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덕이다. 가장 가는 명주 실로 바느질해 접착제로 붙인 듯 바느질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연구사는 “지금은 보강 직물을 덧대 느슨하게 바느질해 놓은 것으로 아직 갈 길이 멀다”며 “3개월 정도 세부 바느질을 하는 등 마무리 작업을 하면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물관의 유물 보존처리 전문가는 직물, 서화, 금속, 목칠기 등 8개 분야에 걸쳐 총 14명이다. 2005년 박물관 개관 당시 3명이었지만 유물 보존관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인원이 보강됐다. 이들의 역할은 철릭처럼 훼손이 심한 유물을 원상태에 가깝게 되살리는 것이다. 원형 복원이 불가능할 경우 현재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관리한다. 유물 생명 연장 전문가인 셈이다.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직물 보존처리 전문가가 조선시대 활옷(궁중 여성 혼례복) 표면의 오염물을 제거하고 있다(위쪽 사진). 아래는 활옷 중 세월에 따라 결실된 부분을 보강 처리하는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보존처리 과정은 재질별로 다르다. 철릭 같은 직물 유물은 염료 등 직물분석(처리 전 조사), 접착제를 이용한 안정화(강화 처리), 오염물 제거, 형태 보정, 보강 작업 등 여러 단계를 거친다. 재질과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전자현미경 등 과학 장비도 동원된다.

보존처리에 들어가는 덧댐 천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등 제약 사항이 많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의 유물 취급 매뉴얼에는 ‘가역성(可逆性) 있는 재료와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시간이 흘러 보존 재료나 기술이 더 발전할 경우 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거 가능한 재료를 써야 한다는 것.

고궁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안녕, 모란’ 특별전에 처음 공개된 조선시대 활옷(궁중 여성 혼례복)도 3년여의 보존처리를 거쳤다. 이 작업에 참여한 김주영 연구원은 “보존처리는 모든 과정에 일일이 사람 손이 가야 한다”며 “증류수를 묻힌 거즈를 옷에 잠깐 얹어놓거나 바느질을 하는 등 최대한 간접적인 방법을 써야 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안 연구사는 “기다림이 반복되지만 바스라질 것 같던 유물이 안정적인 모습을 되찾아 전시되는 걸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24년째 유물 보존처리 작업을 하고 있는 권혁남 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내년에 전시될 조선시대 궁궐 현판들을 보여줬다. 가로로 두 쪽이 나는 등 훼손된 현판들은 접합 및 색 맞춤 작업을 거쳐 재탄생될 예정이다. 창덕궁과 종묘에 보관하다가 박물관으로 이관된 유물들도 수장고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권 연구관은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한 기구)가 발견됐을 당시 보존처리를 맡은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1370년 만에 발견된 백제 유물을 처리하는 역사적 순간에 함께한다는 생각에 영광스러웠어요. 화려하게 전시된 유물 뒤에 이를 후세에 전하려고 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