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백자에서 영감 받은 유리잔, 이렇게 사랑받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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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화점2021-06-2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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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럽고 고리타분하다고 핀잔 듣던 ‘전통’, ‘옛 것’이 멋스러운 트렌드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젊은이들은 자발적으로 한복을 빌려 입고 고궁이나 한옥마을로 나들이를 간다. 반팔 저고리, 철릭원피스처럼 평상시에 입을 수 있는 생활한복도 인기다. 궁중다과 체험장소인 경복궁 생과방은 반나절 정도는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는 명소가 됐다. 전시장 밖으로 뛰쳐나온 전통문화는 ‘요즘 사람들 취향’과 절묘하게 버무려져 유쾌하고 힙해졌다.

"안녕하세요, 왠지 WEDNSY의 황수정입니다. MZ세대에 들어가는 90년대생입니다(웃음)."

1인 브랜드 ‘왠지(WEDNSY)’를 꾸려가는 디자이너 황수정 씨도 전통을 요즘 취향과 ‘버무리는’ MZ세대 중 한 명이다. 갓끈에서 착안한 마스크 줄, 양단 목도리, 액막이 등 각종 소품에 이어 최근에는 상감청자와 청화백자 문양을 응용한 '꽃과자기 시온(변온)유리잔'을 기획했다. 하얀색으로 은은하게 무늬가 들어간 유리잔에 차가운 음료를 담으면 색이 변하는 제품이다. 시온유리잔은 6월 28일 현재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목표금액(100만 원)의 8000%넘게 초과 달성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6월 28일 텀블벅 '꽃과자기 시온유리잔' 페이지 캡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섬유미술·패션디자인, 시각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영상이 하고 싶어서 영상미술 경력도 쌓았고요. 뮤지컬에 푹 빠져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가서 무대미술을 공부하기도 했어요. 대학원 졸업할 때가 다가오니 이 길이 제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방황을 좀 했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은 꼭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덕분에 ‘안 되더라도 일단 해보자’라는 자세로 살고 있다는 황 씨. 혼자서 기획, 디자인, 제작, 배송을 모두 책임지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시온유리잔으로 얻은 폭발적인 관심에 마냥 행복한 상태다.

시온유리잔 인기가 엄청난데, 인기 비결이 있나요?

“저도 이렇게 잘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5일 차에 후원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했어요. 알고 보니 한 트위터 이용자 분이 저희 제품 이야기를 올리셨고 그 게시물이 8000회 이상 리트윗(공유)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죠. 이 자리를 빌어 @my_k_history 님께 다시 한번 감사말씀 드리고 싶어요.

제 성격상 가장 어려운 업무가 홍보/영업인데 이번 인기는 정말 우연이 만들어 준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 행운도 저희 제품이 예쁘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닐까요? 하하하. 열심히 했던 만큼 그 노력은 배신하지 않고 이렇게 저에게 선물을 준다는 걸 느낍니다.”
사진=황수정 씨 제공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 MZ세대에게 ‘직장’과 ‘일’은 더 이상 동의어가 아니다. 황 씨도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의 일’을 찾아 헤매는 청년 중 하나였다.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지만 점점 지쳐 갔고, 일생 동안 할 수 있는 일감을 찾다가 평소에 좋아하던 문구와 소품을 제작해서 팔아 보기로 했다. 그렇게 2016년 대학시절 친구와 함께 시작한 브랜드가 ‘왠지’ 였다. 서울, 고궁 등 한국적인 요소를 담아 제품을 디자인했다.

시작은 즐거웠지만 회사생활과 사업을 병행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황 씨와 친구 모두 부담과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자연스레 ‘왠지’ 운영은 흐지부지되었다.

“'왠지'가 흐지부지 중단되니 '그냥 회사 열심히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회사에 충실하다가 2018년에 퇴사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졸업하면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빙자한 이민’을 갈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2020년 3월에 비자까지 받아 놨는데, 그 다음 주에 유럽에서 코로나19 셧다운(봉쇄령)이 시작된 거예요. 모든 계획이 다 무산되니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어요. 자포자기 상태로 몇 개월 동안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었는데, 언니가 갑자기 ‘왠지’를 다시 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네가 잘 하는 일을 해 보라’며 격려해 준 언니 덕에 잊고 있었던 ‘왠지’가 다시 떠올랐다. 이 참에 본격적으로 그간 묵혀 두었던 ‘한국적인 것’에 대한 한을 풀어 보기로 결심했다.
사진=황수정 씨 제공
'사이드잡'으로 시작한 1인 브랜드, 이제 빛이 보입니다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내면 뿌듯하긴 하겠지만 정말 힘들 것 같아요.

“근본적으로 1인 기업이라는 것 자체가 어려움이더라고요. 디자인, 제작, 포장, 제품촬영, 온라인 운영 등등 저 혼자서만 다 하기 어려운 단계에서는 중간중간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아직은 주변 분들의 ‘자원봉사’ 도움을 받지만, 언젠가 월급을 줄 수 있는 날도 오겠죠?”

시온유리잔을 만들면서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나요.

“이전 제품들(마스크 끈, 목도리 등)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고도의 전문기술이 접목된 제품은 없어요. 아직 가내수공업 수준도 못 되는 1인 브랜드라서 불확실성을 낮추기 위해 제 손으로 샘플을 100% 다 만들 수 있는 제품을 선호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시온유리잔부터는 좀 달라졌어요. 제가 유리잔을 만들 수 없으니 수없이 발품을 팔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까다로운 조건도 들어주시는 좋은 사장님들과 연을 맺어서 마침내 제품이 탄생한 순간 강렬한 쾌감을 느꼈어요. 준비하는 동안 분명 좌절도 했고 울기도 했는데,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때마다 이 쾌감에 중독되는 것 같아요. 제가 공들인 만큼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걸 느낄 때마다 ‘인생 대충 살지 말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전통’하면 마니아들만 좋아하는 분야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 전통적인 것이 곧 세련됨과 통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수정 님이 생각하시는 ‘전통’은 무엇인가요.

“전통이란 그 시대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해요. 일본 교토에서 교환학생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전통을 아주 쉽게 접한다는 걸 느꼈어요. 박제되지 않고 살아 숨쉬는 전통을 대대손손 누리는 분위기였죠. 우리도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전통요소가 넘치는데 왜 우리나라는 전통과 현대가 단절되어 있을까 의아했고요. 저는 전통이 거창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옛날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21세기 후손들의 일상에서도 활용된다면 정말 좋지 않을까요?”

'왠지’ 브랜드가 추구하는 지향점을 묻자 황 씨는 “실생활에서 쓰일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시온유리잔은 매병과 달항아리에서 형태적 모티브를 따 왔는데요. 매병은 말하자면 옛날 꽃병이고, 달항아리도 간장 항아리로 쓰였을 거예요. 하지만 매병과 달항아리 모두 지금은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죠. 저는 이 유물들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 브랜드를 어떻게 키워나가고 싶으신가요.

"청자백자시온유리잔은 국립중앙박물관 뮤지엄샵 입점을 목표로 제작되었습니다. 아직 발표를 기다리는 중인데 꼭 입점해서 명예도 얻고 오프라인을 통해서도 더 많은 분들께 선보이고 싶어요.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가 되어 전 세계인에게도 선보이겠다는 목표가 있고요. 아마존에 입점해서 세계 곳곳으로 저희 제품이 퍼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예전에 털목도리를 펀딩하던 때에는 수출 의뢰가 들어오곤 했는데 당시에는 제가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거절했어요. 이제 탄탄히 업력을 쌓아 세계 각 곳으로 수출하고, 해외 잡지 인터뷰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덕후 기질도 상당한데 언젠가 제가 좋아하는 장르를 바탕으로 삼아서 세컨브랜드도 열고 싶어요.ㅎㅎㅎ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왠지랍니다.”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