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맹정음, 시각 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 만든 세상의 빛

핸드메이커
핸드메이커2020-12-08 15:59:18
공유하기 닫기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훈맹정음'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문화재청은 한글점자인 『훈맹정음』 관련 점자표 및 해설 원고 등 두 점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했다. 『훈맹정음』은 송암 박두성 선생이 1926년 11월 4일에 반포한 우리나라 최초의 6점식 점자로, 일제강점기 시대 시각장애인들이 한글과 같은 원리를 통해 글자를 익히도록 한 고유의 문자 체계다.

이번에 등록되는 국가등록문화재 제800-1호 「한글점자 『훈맹정음』제작 및 보급 유물」은 「훈맹정음」의 사용법에 대한 원고, 제작 과정을 기록한 일지, 제판기, 점자인쇄기(로울러), 점자타자기 등 한글점자의 제작·보급을 위한 기록, 기구 등 8건 48점으로 당시의 사회·문화 상황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근대 시각 장애인사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문화재 등록 가치가 높다.

또한 국가등록문화재 제800-2호 「한글점자 『훈맹정음』 점자표 및 해설 원고」는 「한글점자」육필 원고본, 「한글점자의 유래」 초고본 등 한글 점자의 유래, 작성 원리, 그 구조와 체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이다. 훈맹정음이 창안되어 실제로 사용되기 이전까지의 과정을 통해 당시 시각 장애인들이 한글을 익히게 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어 문화재의 등록 가치가 크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첫 점자
바르비에의 12점 점자 /인천문화재단
시각 장애인들의 의사소통을 위한 문자 개발의 기원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된 시각장애인용 문자판은 타벨라(Tabella)라 불렸는데, 이는 나무, 상아 또는 금속판에 문자를 직접 써 넣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1808년에 이르러 마침내 프랑스의 육군 장교 바르비에(Barbier)가 처음으로 점자를 고안하게 된다. 바르비에는 야간 전투에서 불 없이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손으로 만져서 읽을 수 있는 점으로 된 문자를 생각해 냈다.
루이 브라유는 오늘날 점자의 형태를 확립했다 /flickr
오늘날과 같은 점자 형태는 1829년 파리 맹아학교에 재학 중이던 루이 브라유에 이르러 첫 윤곽이 잡힌다. 루이 브라유는 3살 때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송곳을 가지고 놀다가 왼쪽 눈이 찔리는 사고로 실명하고, 4살 때는 오른쪽 눈마저 감염으로 실명한다. 그가 살았던 쿠브레 마을 성당 신부인 자크 파뤼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10세 때에는 파리의 '왕립맹아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맹아학교에서 사용하던 문자는 맹아학교의 창시자인 아우이(Valentin Hauy)가 창안한 돌출 문자였다. 그러나 실제 글자를 표현한 것이었기 때문에 글자 크기가 7cm나 되어 맹인들이 사용하기에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국립맹아학교에 다니던 브라유는 1821년 어느 날, 학교를 방문한 육군 포병 장교인 샤를 바르비에로부터 묘한 종이 한 장을 건네받게 된다. 그 종이는 밤중에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작은 요철로 암호를 볼록하게 새겨 놓아 빛이 없어도 손가락을 더듬어 읽는 방식이었다. 루이 브라유는 이 방식의 문자 구조를 금세 익혔고, 3년간의 노력 끝에 1824년 정사각형 모양으로 정렬된 여섯 개의 볼록한 점으로 알파벳 26글자를 모두 표시하는 새로운 격자 체계를 개발했다. 또한 맹인들이 쉽게 읽는 것뿐만 아니라 쓸 수도 있는 점자를 완성하였다. 오늘날 점자의 영어 철자(Braille)는 브라유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훈맹정음의 구조
1926년의 훈맹정음 /국립한글박물관
처음 훈맹정음 연구를 시작할 때 서양이나 일본의 점자를 따라 만들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송암 박두성은 아이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글의 원리를 그대로 따라 만들게 된다. 한글은 한글은 ‘ㄱ, ㄴ, ㄷ…’ 같은 자음과 ‘ㅏ, ㅓ, ㅗ, ㅜ…’ 같은 모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자음과 모음만 알면 어떤 글자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 한글 점자는 한글의 원리와 같이 초성(자음 첫소리), 중성(모음), 종성(자음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 점자인 훈맹정음은 여섯 개의 점으로 자음이나 모음을 나타내는 ‘6점식 점자’로, 점자는 6개의 점을 하나의 단위로 6개 가운데 2개 또는 3개를 도드라지게 하여 자음 또는 모음을 표시하는 구조다.
훈맹정음, 오늘날 점자의 체계 /국립한글박물관
‘훈맹정음’은 배우기 쉽고, 점 수가 적고, 서로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는 세 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만들었다. 자음 첫소리는 기본점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자음의 받침은 자음의 첫소리를 좌우 또는 상하로 이동시켜 만들었는데, 좌우 이동이 어려운 경우에는 아래로 1점씩 이동시켜 글자를 만들었다. 모음은 대칭성을 이용해 글자를 만들었다.

한글 점자는 한글 풀어쓰기 원칙으로, 받침을 아래 쓰지 않고 가로쓰기를 하는 식이다(예 : 한글 → ㅎ, ㅏ, ㄴ, ㄱ, ㅡ, ㄹ)한 점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 점자 체계에 큰 지장이 없는 초성의 'ㆁ'자는 빼고, 받침에서의 'ㅇ'은 사용하며(예: 아→ ㅏ , 안녕→ ㅏㄴㄴㅕㅇ)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읽는다.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 박두성
송암 박두성 선생 /국립한글박물관
송암 박두성의 원래 이름은 두현(斗鉉)이었으나 호적 표기가 잘못되어 두성(斗星)으로 부르게 되었다. “국권회복의 장래는 국민교육을 장려하여 문맹을 퇴치하는데 있다. 너는 우선 사범교육을 받고 교육의 선봉에 나서라”는 성재 이동휘의 권유로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박두성은 이동휘로부터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의미의 ‘송암’이라는 호를 받아 남이 하지 않는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일제가 조선인 유화정책의 하나로 설립한 조선 총독부 제생원 내 맹아부에 박두성이 발령을 받게 되며, 그는 암흑뿐인 맹교육의 애로점을 파악하는 데 노력한다. 박두성은 일제 치하에서 앞도 안 보이는 아이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 말로 수업하고, 일본 점자를 익히는 것을 보고 탄식을 한다. 당시 주입식 교육에 한정된 아이들을 향한 맹인 교육의 현실을 깨달은 박두성은 교육의 기본 자료인 점자 교과서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1913년 8월 14일, 일본에서 점자인쇄기를 들여와 일본어이긴 하지만 한국 최초로 점자 교과서를 출판한다.
박두성이 쓴 '훈맹정음의 유래' 초고의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1920년 박두성은 본격적으로 한글 점자 연구에 몰두하며 제자인 이종덕, 전태환 등 8명을 모아 ‘조선어 점자연구위원회’(육화사)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연구에 매진한다. 박두성은 독창적이면서도 배우기 쉬워야 하고, 서로 헷갈리지 않아야 하는 체계의 한글 점자를 만들기 위해 7년을 연구한 끝에 1926년 한글점자를 창안하고, 11월 4일 ‘훈맹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를 하게 된다.

그는 한글 점자의 연구와 완성뿐만 아니라 이를 전국에 퍼져 있는 맹인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숨어 살고 있는 맹인을 위해서 가르치고 읽을 거리들을 배포한다. 박두성은 “너희들이 눈은 비록 어두우나 마음까지 우울해서는 안된다. 몸은 비록 모자라도 명랑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안 배우면 마음조차 암흑이 될 테니 배워야 하느니라”라며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너희들은 눈을 못 보니 약기라도 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러니 주판쯤은 놓을 수 있어야 내 주머니의 것이라도 간직하고 살지...“라며 시각 장애인들에게 주판을 가르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박두성 선생의 작업 노트들 /교육부 공식 블로그
박두성은 이광수전집, 명심보감, 천자문, 소공자, 이솝우화, 뉴스 등 앞을 못 보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점자로 번역하며 읽을거리를 만들면서 살다 마지막 순간까지 “점자책 쌓지 말고 꽂아...”라는 유언을 남기며 1963년 8월 25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손끝의 촉각으로 읽어야 하는 점자책의 특성상 책이 쌓여 있으면 무게에 짓눌려 시각 장애인들이 점자를 읽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저런 말을 남긴 것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시각 장애인들을 생각했던, 그들에겐 세종대왕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훈맹정음, 눈 먼 이들에게 세상을 알려주는 소중한 도구이자 유산
박두성 선생의 흉상 /송암박두성기념관
1926년 훈맹정음을 반포한 이후 한글 점자 보급에 갖은 노력을 기울인 송암 박두성이 출판한 한글 점자책만 현재 200종이 넘는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던 이유는 모든 백성이 글을 쉽게 읽고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박두성도 시각 장애인들이 읽기 쉽고 배우기도 쉬운 글자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훈맹정음을 11월 4일에 반포했는데,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이 9월 29일이고 이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1월 4일이기 때문에 그날 반포를 한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11월 4일은 한글점자기념일이기도 하다. 시각 장애인들을 향한 그의 애정의 깊이는 대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조차 잘 되지 않을 정도다.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남들처럼 똑같은 빛을 보게끔 하고 싶었던 한 사람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훈맹정음은 오늘날 국가등록문화재로 공식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고유 언어라는 점에서 문화적 가치가 크며,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근대 시각장애인사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써 문화재 등록 가치가 높다며 등록 사유에 대한 이유를 밝혔다. 특히 시각 장애인 문화유산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박두성 선생이 사용했던 제판기와 점자타자기 /인천시
“나는 좋은 일이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고, 필요한 것을 하느라고 한평생 지나온 것뿐입니다. 그러니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칭찬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점자는 시각장점자는 시각장애인들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써 시각장애인들에게 문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신감뿐만 아닌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단이 바로 점자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제 점령하던 시기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현실은 더욱 암담 그 자체였다. 의사소통은커녕 우리말과 우리 글조차 자유롭게 쓰지 못하던, 사람들에겐 모든 것이 어둠이던 그 때 박두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세상의 빛을 눈먼 이들에게도 전해주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훈맹정음은 오늘날까지도 어두운 터널에 갇힌 시각 장애인들에게 빛이 보이는 출구를 안내하는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