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한 달 살기’ 꿈 이룬 프리랜서

프리랜서코리아
프리랜서코리아2020-04-27 17:11:38
공유하기 닫기
전세계를 누비는 디지털 노마드

서한교 UX/UI 프리랜스 디자이너 인터뷰
누구나의 버킷리스트에 있는 한 줄이 있다. ‘외국에서 한 달 살기’

그런데 그게 참 말이 쉽지, 실천이 어렵다. 돈도 있어야 되고 시간도 있어야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의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로운 업무환경과 독립성을 꿈꾸는 2030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전하는 ‘디지털 노마드’, 서한교 프리랜스 디자이너를 신촌의 한적한 카페에서 만났다. 읽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그의 프리랜서 스토리를 지금 만나보자.

개발자가 되고 싶었던 '디자이너'

Q. 사회에서 어떤 경력을 쌓았었고, 무슨 계기로 프리랜서의 길을 걷게 됐나?
다시 디자인에 흥미를 갖게 해준 '코딩 부트 캠프'의 추억 :)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너무 힘들기도 했고 디자인에 대한 재미가 조금씩 떨어져서 디자인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던 때가 있었다. 당시, 디자이너가 아닌 개발자가 되려는 생각으로 ‘코딩 부트 캠프’에 들어갔다. 정말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씩 코딩 공부를 하며 개발과 씨름했던 것 같다.

원래 IT업계에서 개발과 디자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지 않나. 개발 원리를 알게 되니 그제야 개발 위에 디자인이 어떻게 입혀지는 지가 보였다. 다시 디자인에 흥미가 붙기 시작하면서, 캠프를 마친 뒤 바로 IT회사의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다.

개발과 디자인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 이후부터, 앱과 웹이 만들어지는 전체적인 프로세스에 관심이 많아졌다. 회사에서 마케팅 등 내가 들어가지도 않아도 되는 회의에 들어가보고 이곳저곳 많이 기웃거렸다. 동시에 회사 외부에서 기획부터 출시까지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사이드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자연스럽게 프리랜서 삶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면서 회사를 나오게 됐다.
Q. 많은 디자인의 영역 중 특별히 UI/UX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있나? 본인이 가장 추구하는 디자인 방향이 궁금하다.
아기자기한 매력의 서한교 디자이너 일러스트. 그만의 먹스타그램(?)이 유난히 눈에 띈다.
전공 기간에 주로 오프라인 인쇄 작업을 할 땐 깨진 글자, 컬러 오류 등 틀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심했다. 그러다 대외활동을 하며 온라인 쪽 업무를 접했는데 재밌더라. 일단 빠르게 만들고 잦은 수정을 통해 퀄리티를 높여가는 방식이 나와 잘 맞았다.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가 함께 팀으로 어우러져 목표를 달성해 가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특히 온라인의 영향력 덕분에, 미약하지만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쉽게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보람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크린의 터치감이 살아있는 디지털 기기를 좋아한다. 내가 만든 결과물이 보이는 디스플레이가 잘 터치 될 때 행복을 느낀다.

추구하는 디자인 방향은 모로 가든 ‘재미’다. 어떠한 것에 대해 이해가 수반돼야 흥미도 높아지는 것처럼, 유저가 그 프로젝트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디자인하여 궁극적으로 ‘재밌다’고 느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해당 프로젝트가 갖고 있는 포인트를 잘 파악하여 디자인으로 매끄럽게 풀어내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Q. 보통 프로젝트는 어떤 경로를 통해 수주하고, 본인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아직 프리랜서 경력이 길지 않아서 보통 지인을 통해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편이다. SNS에 올라오는 프로젝트 공고를 보고 흥미로운 내용이면 포트폴리오를 보내기도 한다.

내 경쟁력이라면 아무래도 ‘주도적인 소통능력’ 같다. 소통하는 것을 워낙 좋아한다. 클라이언트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 지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내고, 이를 구체화해서 개발자가 잘 프로그래밍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일련의 과정을 즐긴다.

‘금성에서 온 개발자, 화성에서 온 디자이너’라는 비유가 있다. 그만큼 두 직종이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나는 사실 개발자와 일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 한때 개발을 공부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디자이너가 개발에 조금이나마 관심 갖는 것을 추천한다. 모두가 동등한 관계에서 원활한 소통이 있었을 때 늘 결과물도 더 좋았기에, 앞으로도 말이 잘 통하는 디자이너로 어필되고 싶다.
포털 실검 '국민투표로또'부터 '화제의 신간'에 오르기까지

Q. 지금까지의 프로젝트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혹은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무엇인가?
JTBC <뉴스룸>을 포함하여 여러 언론에 소개됐던 '국민투표로또'
제19대 대선 전, ‘20-30대 투표율이 너무 저조하다’는 기사를 보고 당시 코딩부트 캠프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JTBC <썰전>에서 유시민 작가님이 농담처럼 “투표 용지에 로또 추첨권을 주면 사람들이 다 투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바로 진행하게 된 프로젝트가 선거 후 인증샷을 응모하면 추첨을 통해 상금을 주는 ‘국민투표로또’다. 17년 대선과 18년 지방선거, 총 두 번 진행됐는데 결과가 정말 좋았다.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 오르면서 후원금은 약 1500만원이 들어왔고 방문자는 400만명 이상을 찍었다. 후기에 ‘국민투표로또에 응모하기 위해 선거에 참여했다’는 내용들을 보며 굉장히 뿌듯했다.

개인적으로 큰 가르침을 얻기도 했다. 당시 준비기간이 정말 짧아서, 하루 밤새 디자인을 완료했다. 예전에는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왜 디자이너를 존중 안해주나’ 불평했는데, 같이 만들어가는 입장이 되니 디자인이 빨리 끝나야 개발자가 업무에 착수할 수 있더라. 국민투표로또는 최대한 개발하기 쉽게 디자인하면서, 상황에 따라 감수하고 포기해야 할 것도 있다는 유연성이 생겼다.
Q. 오프라인 상으로 디자인 관련 강의도 한다고 들었다. 어떤 커리큘럼으로 진행되나?
UI 디자인에 특화된 ‘스케치’라는 툴이 있다. 그 툴을 사용하여 UI 디자인에 입문하는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아이데이션부터 와이어프레임, 마지막으로 디자인 입히는 것까지 실제 앱을 만드는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알려드린다. 스케치를 처음 접하는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들이 주로 수강한다.

처음에는 지인으로부터 요청이 들어와 ‘패스트캠퍼스’라는 클래스 플랫폼에서 시작했는데, 점차 스스로 클래스를 기획하고 실행해보고 싶은 욕심이 들더라. 이제는 셀프로 강의를 기획하고 홍보와 관리까지 한다. 강의는 앞으로도 일정이 되면 계속 하고 싶은 분야다.
Q. 브런치에 쓰고 있는 <디자이너 성장일기> 매거진 공유가 1만4천 건이 넘었고, 올해 <이토록 쉬운 스케치>라는 책도 냈더라.
'화제의 신간'으로 소개됐던 <이토록 쉬운 스케치>
내 브런치를 좋게 봐주신 출판사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오프라인 강의를 시작한 시기와 맞물리기도 했고, 일단 뭐든 하고 나면 무조건 성장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 다음주에 바로 계약하고 진행하게 됐다. 그리고 또 바로 후회하긴 했지만.(웃음) 책 쓰는 일이 정말 보통이 아니더라. 책을 쓴다는 것은 강의하는 것과 또 다른 분야의 일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사실 나는 툴을 어려워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툴과 관련된 책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 편하게, 내가 툴을 점차 익혀갔던 즐거운 경험을 담고자 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경험을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거듭된 수정과 보완을 거치느라 고생했지만, 결과물을 볼 때마다 무지 뿌듯하다. 왜 그렇게 책 낸 사람들이 본인의 SNS에 “책 나왔다” 홍보하는지 그 심정을 너무 잘 알겠더라. 너무 고생했으니까 그 보상으로 ‘좋아요’라도 바라게 되는 것 아닐까.(웃음)
'디지털 노마드'로 살다

Q. 본인을 전 세계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로 칭했다. 왜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삶을 추구하나?

워낙 산만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향이다.(웃음) 대학교 때도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버스, 카페 등 여러 곳에서 과제를 했다. 커리어를 시작했던 회사도 자유로운 분위기였기에 회사 내외의 다른 공간을 전전하며 작업하곤 했었다.

어릴 때는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는 내 성격을 자책할 때도 있었는데, 막상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경험해보니 유목민처럼 일하는 것이 내게 더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에는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있었다.

Q. '치앙마이'로 떠난 것도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삶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나? 왜 치앙마이였나?
치앙마이에서 보낸 여유로운 일상. 한적한 풍경 덕분에 마음마저 편안해진다 :)
문득 해외로 내 삶을 옮겨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다른 환경에서 작업하다 보면, 거기서 배우게 되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해외에서 한 달 살기’는 누구나의 버킷리스트에 있지 않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노트북을 들고 치앙마이로 떠났다.

치앙마이로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디지털 노마드를 검색해보니 치앙마이가 가장 많이 언급되더라.(웃음) 직접 가 보니 왜 치앙마이가 노마드들의 성지인지 피부로 와 닿았다. 먼저 온라인 인프라가 잘 돼 있다. 기본적으로 물가가 저렴한데, 특히 인터넷이 싸고 빨라서 작업하기에 수월했다.

그리고 치앙마이에는 일할 수 있는 카페나 코워킹 스페이스가 굉장히 많다. 노트북만 들고 다니며 일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금방 분위기에 동화됐던 것 같다. 사실 떠나기 전에는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있었지만, 치앙마이에 금방 적응하는 내 모습을 보며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삶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Q. 치앙마이에서 무엇을 느끼고 돌아왔나?
치앙마이에서 타고 다녔던 오토바이와 찰칵!
치앙마이로 떠나기 전에는 ‘다들 열심히 사는데 나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라는 압박감이 있었다. 한국에는 타인의 삶을 기준으로 내 삶을 재단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나. 주변의 소리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치앙마이로 떠났던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했던 선택이었다.

태국에는 느린 문화가 있다. 치앙마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클랙슨 소리를 듣지 못했다. 교통체증이 심해도 어느 누구도 보채지 않는다. 그런 느긋함에서 오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항상 온화한 표정의 태국 사람들을 보면 마음 속 깊숙이 힐링 되는 느낌이었다. 이 덕분에 내 마음의 소리만을 들으며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치앙마이에서 두 달 살았고, 관광지를 다닌 것까지 포함하면 태국에 80일가량 있었다. 혹자는 질리지 않냐고 할테지만 언젠가는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다. 2주 뒤에는 포르투갈로 떠난다. 그곳에 세 달 간 체류하며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삶을 계속 시도할 예정이다.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 기대가 많이 된다.

Q. 프리랜서로서 느끼는 고충이 궁금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직장인이든 프리랜서든 모두에게는 나름의 걱정과 고민이 있는 법. (그림: 서한교 디자이너)
아무래도 마음 한 켠에 남아있는 불안함이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세금 납부, 프로젝트 계약, 영업 등 혼자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 많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당장 일이 없으면 어쩌지’ 하는 것들이 그저 불안하기만 하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생각해보면 회사원이든 프리랜서든 다들 각자의 마음에는 나름의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한 달 정도 일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보릿고개를 한 번 경험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먹게 되더라. 욕심을 낸다고 일이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흘러가는 대로 잘 이겨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이 ‘일을 어디서 구하는지’였고, 지금 프리랜서를 하려는 분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도 이에 대한 것이다. 그 물꼬를 잘 트게 해줄 수 있는 플랫폼이 프리랜서코리아라고 생각한다. 결국 프리랜서 시장 자체가 좋아져야, 그 긍정적 영향이 내게도 좋은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프리랜서 가이드 역할을 프리랜서코리아에서 잘 해줘서, 프리랜서 시장 전체가 순화적으로 잘 작동됐으면 좋겠다.

※ 프리랜서코리아 표준계약서 보러가기 ※


Q. 앞으로의 꿈이나 계획이 궁금하다.
서한교 디자이너의 명함. 치앙마이, 포르투갈에 이은 그의 프리한 행보가 궁금하다.
어렸을 적 꿈이 발명가였다. 한참이 지난 지금 ‘나는 왜 행복한가’ 돌아봤더니,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 그 꿈을 이뤄가고 있더라. 창작가도 어떤 의미에서는 발명가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창작하는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계획이다.

친구와 함께 여러 세계를 떠돌며 각 나라의 기억을 담은 일러스트를 그리는 ‘주섬주섬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치앙마이의 삶을 기록한 독립출판물을 만들고 있다. 앞으로도 국가별로 책을 한 권씩 만드는 꿈을 꾸고 있는데, 다음 국가는 포르투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동시에 여러 사이드프로젝트를 통해 본업인 UX/UI 디자인도 계속 충실하게 임할 것이다. 오늘인터뷰 마치고 ‘국민투표로또’ 회의에 간다. 내년 4월 총선에 대비하여 국민투표로또도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들었던 단어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 ‘자발적 방황기’다. 타의에 의한 방황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한 방황. 나는 이 말이 너무 좋다. 방황의 끝이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삶을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의 답을 몸소 체득해보려 한다. 그 답이 별로라면… 아마 내후년에는 회사원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하

서한교 디자이너의 애장품 공개!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마우스: 작업할 때 쓰는 무선 마우스. 수도 없이 클릭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
-명함: 해리포터에 나오는 "Dobby is free"를 활용해서 만든, 프리랜서로서의 첫 명함
-에어팟: 카페에서 원치 않는 노래가 나올 때 꼭 필요한 아이템
-아이폰: 작업물을 보는 테스트기기 역할. 아이폰에 들어간 작업물은 이상하게(?) 퀄리티가 더 높아보임!
-맥북: 어딜 가든 항상 들고다니는, 애플 제품 중 가장 좋아하는 기기
-아이패드: 그림 그리는 용도로 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