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마술사' 샤론 최 "가면증후군 시달렸다"

29STREET
29STREET2020-02-20 15:34:41
공유하기 닫기
“최성재씨가 없는 상황에서 영어 질문을 받으니 순간적으로 당황했네요. 하하하!”

‘기생충’으로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 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 그는 19일 웨스턴조선호텔에서 진행된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외신기자의 질문을 받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생충의 인기만큼이나 통역사 최성재(샤론 최·28) 씨의 실력도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유튜브 채널 '세상에 없던 생각 For Creators' 영상 캡처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최적의 표현을 고르는 감각, 곤란한 질문에도 당황하지않고 부드럽게 대처하는 센스, 긴 발언도 말끔하게 통역하는 기억력까지 다 갖춘 그는 해외에서도 ‘봉준호의 아바타’, ‘언어의 마술사’라며 극찬받고 있습니다. 영화매체 인디와이어는 최 씨를 ‘오스카 시즌 MVP’라며 추켜세웠습니다.

아카데미상 캠페인 기간 동안 봉 감독의 영화 철학이 잘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의 말을 정확하고 재치있게 전달한 최 씨 덕분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통역가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인 셈입니다.

최 씨는 전문 통역사가 아니라 영화학도입니다. 어릴 때 2년 간 미국에서 지낸 적은 있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며 교육받았습니다. 용인외고 출신인 그는 영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실력을 쌓았다고 합니다. 쉬운 어휘를 써서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한 능력은 타고난 언어감각과 영화에 대한 사랑이 만든 시너지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년간 나는 내 자신의 통역사였다"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며 주목받은 최 씨에게도 남모를 고민은 있었습니다. 그는 19일 미국 연예주간지 버라이어티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 · 실력이 아닌 운 덕분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불안해하는 심리)에 시달렸다”고 고백했습니다.

반 년 동안 이어진 아카데미 캠페인 활동 동안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최성재 씨도 무대 뒤에서는 긴장에 시달렸습니다. 최 씨는 무대에 오르기 전 10초간 명상하고 ‘사람들은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다, 내게 관심 없다’는 생각을 반복하며 불안을 극복했다고 밝혔습니다.
유튜브 '미국이야기' 채널 영상 캡처
"대부분의 사람은 거의 비슷한 뇌 용량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1개 국어를 하는 사람이 단어 1만 개를 안다면 2개 국어 구사자는 각각의 언어에서 5000개씩만 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사이에서 좌절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보여주는 시각적 언어에 빠져들었어요."

“어릴 적에 2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저를 ‘이상한 혼종(strange hybrid)’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국인이라기에는 너무 미국적이고, 미국인이라기에는 너무 한국적인 사람이 된 것이죠. 그렇다고 한국계 미국인도 아니고요. 한국어와 영어를 오가며 사는 것은 제 삶의 방식입니다. 저는 20년 동안 제 자신을 통역하며 살았습니다.”

온갖 SNS에서 자기 얼굴을 보는 것이 참 이상한 경험이라고 털어놓은 그는 지금의 유명세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며, 영화학도답게 당분간은 노트북을 끼고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전했습니다.

“지금 내가 할 유일한 통역은 나 자신과 영화 사이를 이어주는 일 뿐입니다."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