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 대학교 교육대학원 부학장이자 최고기술경영자(CTO).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직함을 가지고 있는 폴 김(52) 교수는 국내에서도 꽤 유명한 교육공학자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비롯한 여러 TV 프로그램과 강연 등을 통해 새로운 교육법을 설파했고, 5년 전에는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라는 교육 서적도 펴냈다. 또 비영리 국제교육재단인 ‘시드 오브 임파워먼트(Seeds of Empowerment)’를 설립했는데, 그곳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인 질문형 학습 솔루션 ‘SMILE’이 2016년 유엔 미래 혁신 학습 모델로 선정되는 등 교육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런 그에게도 회의감에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몇 해 전부터 폴 김 교수는 ‘교육자로서 걸어온 길이 내가 바랐던 그 길인가?’ ‘이 세상에서 과연 몇 명이나 내 논문을 읽고 도움을 얻을까’ ‘나의 이론적 연구가 지금 당장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이 질문의 답을 찾고자 김 교수는 멕시코를 시작으로 전 세계 개발도상국 아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교육 봉사 활동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학습 모델을 개발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갔다.
그런 그에게도 회의감에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몇 해 전부터 폴 김 교수는 ‘교육자로서 걸어온 길이 내가 바랐던 그 길인가?’ ‘이 세상에서 과연 몇 명이나 내 논문을 읽고 도움을 얻을까’ ‘나의 이론적 연구가 지금 당장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이 질문의 답을 찾고자 김 교수는 멕시코를 시작으로 전 세계 개발도상국 아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교육 봉사 활동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학습 모델을 개발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갔다.
긍정의 피드백, 부정적 피드백, 구성적 피드백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여정의 연장선에서 폴 김 교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큰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없는 오지에 물자를 실어 나르는 경비행기 조종사 ‘부시 파일럿(Bush Pilot)’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한 것. 2018년 본격적으로 부시 파일럿 훈련을 받기 시작한 그는 2019년 시계비행 자격증을 취득한 데 이어 2021년 4월에는 악천후나 야간 비행과 같이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을 때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계기비행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 과정을 단순히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취득’이라는 짧은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3년에 걸친 시간 속에서 자격증 이상의 가치를 얻었기 때문. 20년 넘게 근엄한 ‘교수’의 위치에 있던 중년 남성이 다시 가르침을 받는 학생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폴 김 교수는 그 과정에서 ‘리런(Relearn)’, 즉 재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2021년 12월 중순 발간된 그의 책 ‘다시, 배우다(RE:Learn)’에 고스란히 담겼다. 신간이 나온 지 며칠 뒤, 미국 캘리포니아에 머물고 있는 폴 김 교수와 화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수님이 비행기 조종을 배운다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아요. 쉽지 않으셨을 듯한데 첫 비행은 어떠셨나요.
구름 속에 들어가면 사방이 온통 하얀색으로 보여요. 어디가 산인지 땅인지 모른 채 오직 계기에 의존해서 비행을 해야 하죠. 처음 비행 운전을 한 날은 구름이 거의 없었고 교관도 옆에 있었지만, 착륙한 뒤 다리에 힘이 다 빠져서 못 걸었을 정도였어요. 긴장을 너무 많이 했던 거죠. 비행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쓰고 불안하기도 한데 계속해야 하나?’ 하면서도, 그런 상황에 스스로를 집어넣고 불안함, 두려움, 불확실성, 부정적인 생각 등을 친구 삼아야 해요. 그러다 훈련이 쌓이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져 일상처럼 되는 날이 오는 거죠.
오지로 봉사 활동을 다니시면서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어 경비행기 자격증을 따셨다고 들었어요. 경비행기를 실제로 이용해보니 어떻던가요.
이동 시간이 확실히 많이 줄어들어요. 또 일반 상업용 비행기를 타려면 탑승 절차 때문에 이륙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들잖아요. 그런데 경비행기는 타서 시동 걸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국경을 넘는 비행을 할 때도 작은 공항의 경우, 입국 절차가 아주 간단하고 파일럿에게는 그리 많은 질문을 하지 않더라고요.
비행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다고요.
스탠퍼드 대학교에 20년 이상 재직해오면서 특별한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 비행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학생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 자체가 저로선 엄청난 도전이었죠. 학생의 위치에 서보니 학생의 감정들과 상황들을 다시 한번 이해하게 돼 ‘교육자라면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했죠. 마침 처음 만난 교관이 저희 대학 학부생이더라고요. 저는 대학원에 있어서 학부생과 함께할 일은 없었는데, 학부생에게 배울 게 너무도 많았어요. 그 학생 덕분에 더욱더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죠.
교육자다 보니, 교관의 교육 방식에도 관심이 많았을 것 같아요.
모두 세 명의 교관을 거쳤는데, 재미있게도 세 명 모두 다른 피드백을 주었어요. 첫 번째 만난 교관은 신참이라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제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줬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 “잘한다”는 칭찬은 50대가 되어 전혀 모르는 분야에 뛰어든 제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두 번째 교관은 정반대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줬어요. “그것도 못 하나?” “이렇게 하면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식으로 가르치니까 주눅이 들더라고요. 세 번째 교관은 연세가 있는 노련한 교관님이었는데, 그분은 정확한 피드백을 주셨어요. 내가 왜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죠. 그런 피드백을 ‘구성적 피드백’이라고 해요. 교육자로서 긍정적 피드백과 구성적 피드백이 중요한데, 네거티브 피드백은 쓸데가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어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게 해준 시간이었죠.
학창 시절에도 ‘네거티브 피드백’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지요.
초중고를 한국에서 다니며 많이 맞았던 기억이 있어요. 공부를 못했거든요. 선생님은 혼을 내시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는데, 그 말은 곧 “봉투를 가지고 오라”는 말이어서 더더욱 엄마를 오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니 더 맞았어요.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선생님은 제게 모멸감을 주는 말을 종종 하셨지요. 증명사진을 제출하라고 해서 제출하면 “바보같이 찍어 왔다”고 하는 식이었어요. 그런 말들은 아직도 꿈에 나와요. 지금도 선생님들 상대로 교육할 때 꼭 말씀드리는 건 긍정적인 피드백과 부정적인 피드백이 미치는 영향력이에요. 어릴 때는 감수성이 예민한데, 이때 받는 피드백들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거든요.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시력 테스트가 정말 어려웠어요. 필기시험도 쉽지 않았어요. 제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일정을 소화하면서 공부하는 건 불가능했죠. 호텔에서 짬짬이 했는데, 집중이 안 됐어요.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았고요. 1년 반 정도 걸렸는데, 젊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한다면 시계비행까지 3~6개월 정도 걸리는 과정이에요.
짬을 내서 공부하다 보면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을 것 같아요.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이 루틴화가 됐어요. ‘하루 30분 공부, 30분 운동’ 이런 식이었죠. 항상 스케줄이 똑같았어요. 운동이나 공부는 시간이 남을 때 몰아서 하기보다는 조금씩이라도 지속적으로 했을 때 기억에 남아요. 몰아서 하면 집중력도 없어지고 시간이 더 많이 걸리지요. 항상 두뇌를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라도 자주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비행기 조종 면허를 취득했을 때 주변 반응이 궁금해요.
와이프는 “나도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누구나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첫발을 떼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해야지’ 생각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어려웠어요. 재미있는 건 부학장 중 몇몇이 파일럿이더라고요. 테크놀로지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비행기 조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과정을 단순히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취득’이라는 짧은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3년에 걸친 시간 속에서 자격증 이상의 가치를 얻었기 때문. 20년 넘게 근엄한 ‘교수’의 위치에 있던 중년 남성이 다시 가르침을 받는 학생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폴 김 교수는 그 과정에서 ‘리런(Relearn)’, 즉 재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2021년 12월 중순 발간된 그의 책 ‘다시, 배우다(RE:Learn)’에 고스란히 담겼다. 신간이 나온 지 며칠 뒤, 미국 캘리포니아에 머물고 있는 폴 김 교수와 화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수님이 비행기 조종을 배운다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아요. 쉽지 않으셨을 듯한데 첫 비행은 어떠셨나요.
구름 속에 들어가면 사방이 온통 하얀색으로 보여요. 어디가 산인지 땅인지 모른 채 오직 계기에 의존해서 비행을 해야 하죠. 처음 비행 운전을 한 날은 구름이 거의 없었고 교관도 옆에 있었지만, 착륙한 뒤 다리에 힘이 다 빠져서 못 걸었을 정도였어요. 긴장을 너무 많이 했던 거죠. 비행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쓰고 불안하기도 한데 계속해야 하나?’ 하면서도, 그런 상황에 스스로를 집어넣고 불안함, 두려움, 불확실성, 부정적인 생각 등을 친구 삼아야 해요. 그러다 훈련이 쌓이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져 일상처럼 되는 날이 오는 거죠.
오지로 봉사 활동을 다니시면서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어 경비행기 자격증을 따셨다고 들었어요. 경비행기를 실제로 이용해보니 어떻던가요.
이동 시간이 확실히 많이 줄어들어요. 또 일반 상업용 비행기를 타려면 탑승 절차 때문에 이륙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들잖아요. 그런데 경비행기는 타서 시동 걸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국경을 넘는 비행을 할 때도 작은 공항의 경우, 입국 절차가 아주 간단하고 파일럿에게는 그리 많은 질문을 하지 않더라고요.
비행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다고요.
스탠퍼드 대학교에 20년 이상 재직해오면서 특별한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 비행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학생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 자체가 저로선 엄청난 도전이었죠. 학생의 위치에 서보니 학생의 감정들과 상황들을 다시 한번 이해하게 돼 ‘교육자라면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했죠. 마침 처음 만난 교관이 저희 대학 학부생이더라고요. 저는 대학원에 있어서 학부생과 함께할 일은 없었는데, 학부생에게 배울 게 너무도 많았어요. 그 학생 덕분에 더욱더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죠.
교육자다 보니, 교관의 교육 방식에도 관심이 많았을 것 같아요.
모두 세 명의 교관을 거쳤는데, 재미있게도 세 명 모두 다른 피드백을 주었어요. 첫 번째 만난 교관은 신참이라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제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줬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 “잘한다”는 칭찬은 50대가 되어 전혀 모르는 분야에 뛰어든 제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두 번째 교관은 정반대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줬어요. “그것도 못 하나?” “이렇게 하면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식으로 가르치니까 주눅이 들더라고요. 세 번째 교관은 연세가 있는 노련한 교관님이었는데, 그분은 정확한 피드백을 주셨어요. 내가 왜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죠. 그런 피드백을 ‘구성적 피드백’이라고 해요. 교육자로서 긍정적 피드백과 구성적 피드백이 중요한데, 네거티브 피드백은 쓸데가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어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게 해준 시간이었죠.
학창 시절에도 ‘네거티브 피드백’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지요.
초중고를 한국에서 다니며 많이 맞았던 기억이 있어요. 공부를 못했거든요. 선생님은 혼을 내시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는데, 그 말은 곧 “봉투를 가지고 오라”는 말이어서 더더욱 엄마를 오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니 더 맞았어요.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선생님은 제게 모멸감을 주는 말을 종종 하셨지요. 증명사진을 제출하라고 해서 제출하면 “바보같이 찍어 왔다”고 하는 식이었어요. 그런 말들은 아직도 꿈에 나와요. 지금도 선생님들 상대로 교육할 때 꼭 말씀드리는 건 긍정적인 피드백과 부정적인 피드백이 미치는 영향력이에요. 어릴 때는 감수성이 예민한데, 이때 받는 피드백들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거든요.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시력 테스트가 정말 어려웠어요. 필기시험도 쉽지 않았어요. 제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일정을 소화하면서 공부하는 건 불가능했죠. 호텔에서 짬짬이 했는데, 집중이 안 됐어요.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았고요. 1년 반 정도 걸렸는데, 젊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한다면 시계비행까지 3~6개월 정도 걸리는 과정이에요.
짬을 내서 공부하다 보면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을 것 같아요.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이 루틴화가 됐어요. ‘하루 30분 공부, 30분 운동’ 이런 식이었죠. 항상 스케줄이 똑같았어요. 운동이나 공부는 시간이 남을 때 몰아서 하기보다는 조금씩이라도 지속적으로 했을 때 기억에 남아요. 몰아서 하면 집중력도 없어지고 시간이 더 많이 걸리지요. 항상 두뇌를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라도 자주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비행기 조종 면허를 취득했을 때 주변 반응이 궁금해요.
와이프는 “나도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누구나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첫발을 떼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해야지’ 생각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어려웠어요. 재미있는 건 부학장 중 몇몇이 파일럿이더라고요. 테크놀로지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비행기 조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한국 학교 열등생이 미국 대학 우등생 된 비결
왠지 생각이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것 같아요. 어떤 학생이셨나요.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어요. 막내였는데 형제들과는 5, 7년 차이가 났고 부모님은 저를 방목형으로 키우셨어요. 누나가 읽던 찢어진 책을 읽으며 자랐어요. 앞뒤가 찢긴 책을 읽으면서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하겠지?’ ‘책이 이렇게 끝날 거야’라고 상상력을 발휘하곤 했죠. 초등학교 때 컴퓨터가 나왔는데, 그것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어요. 컴퓨터를 살 형편은 아니라 세운상가 컴퓨터 매장에서 긴 시간을 보내곤 했죠. 컴퓨터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있으면 따라가서 창문 밖으로 뭘 하는지 보는 거예요. 그리고 수업 내용을 적어서 컴퓨터 매장에 가 코드를 쳐보곤 했죠.
미국 유학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려서부터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 살면서 ‘이게 민주주의가 맞나?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부모님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땡이다.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식이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미리 나가겠다”고 해본 적도 있지만 물론 안 됐죠(웃음).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왔어요. 넉넉한 집안이 아니라 부모님은 비행기표만 사주시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고 하셨어요. 정말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거죠. 공부를 워낙 못했으니 영어도 몰라서 맥도날드 주문을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영어를 잘하게 된 자신만의 비법이 있을까요.
어학원에 다닐 돈을 벌기 위해 세차를 하고, 중국집이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ELS(어학원)에서 공부하며 대학 입학 과정에 필요한 영어를 습득해야 했는데, 그때 어떻게 하면 회화를 빨리 배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역시 회화를 빨리 배우는 방법은 친구들을 만나는 거였어요. 그래서 기숙사 문에 ‘FREE BEER(맥주 무료)’라고 써 붙였더니 저희 방에 오려는 아이들이 줄을 서더라고요.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서 영어를 빨리 익히게 됐죠. 방에서는 항상 CNN을 틀어 24시간 영어권에 있게 했어요. 영화 ‘어 퓨 굿 맨’을 30번 봐서 대사를 몽땅 외워버렸고요.
영어를 아예 못 하던 학생에서 교수가 되기까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 공부를 잘하게 됐나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미국을 간 거라 미국인 친구들은 한 번 읽으면 이해하는 내용을 저는 10번은 읽어야 했어요. 도서관 딱딱한 의자에 10시간씩 앉아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공부했죠. 좋은 교수님을 만난 것도 큰 영향을 줬어요. 초중고 통틀어서 제 성적표는 ‘수’는커녕 온통 ‘양가양가’였어요. 대학에 입학해서 ‘어떤 수업을 들을까?’ 하다가 만만해 보이는 음악 수업에 등록했는데 실수였죠. 음악을 듣고 감상문을 5장이나 써내야 했어요. 음악 감상문은 상당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데, 영어 형용사를 잘 모르니까 짧게 몇 줄밖에 못 쓰겠는 거예요. 교수님이 제 감상문을 받고 “이게 뭐냐? 어느 나라에서 왔냐? 한국말은 쓸 수 있냐?” 물으시더니, 한글로 써오라고 하셨어요. 한글로 감상문을 써서 가니, 사전을 찾아가며 한 단어 한 단어 설명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손짓 발짓을 하면서 써온 감상문을 설명하는 걸 들으시곤 “감수성이 좋네. 이 수업은 영어 수업이 아닌 음악 수업이다. 너의 감수성은 충분히 좋다” 하시곤 A를 주셨어요. 그때 정말 감동받았어요. 정확하게 제 약점과 단점을 아시고 코칭을 해주신 거예요. 티칭이 아닌 코칭을요. 진정한 교육자는 가르치지 않고 코칭을 합니다. 이후 학습 동기가 유발됐어요. 그다음부터 늘 A를 받고 싶어서 열심히 했고, 정말로 줄줄이 A를 맞았어요.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달은 계기였을 듯해요.
교수님 덕분에 제 인생이 180도 바뀔 수 있다는 걸 경험했고, 학생들에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어요. 그때 컴퓨터를 전공했는데 ‘컴퓨터 공학을 교육에 활용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교육공학 석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지금 이 자리까지 왔네요.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어요. 막내였는데 형제들과는 5, 7년 차이가 났고 부모님은 저를 방목형으로 키우셨어요. 누나가 읽던 찢어진 책을 읽으며 자랐어요. 앞뒤가 찢긴 책을 읽으면서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하겠지?’ ‘책이 이렇게 끝날 거야’라고 상상력을 발휘하곤 했죠. 초등학교 때 컴퓨터가 나왔는데, 그것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어요. 컴퓨터를 살 형편은 아니라 세운상가 컴퓨터 매장에서 긴 시간을 보내곤 했죠. 컴퓨터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있으면 따라가서 창문 밖으로 뭘 하는지 보는 거예요. 그리고 수업 내용을 적어서 컴퓨터 매장에 가 코드를 쳐보곤 했죠.
미국 유학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려서부터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 살면서 ‘이게 민주주의가 맞나?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부모님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땡이다.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식이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미리 나가겠다”고 해본 적도 있지만 물론 안 됐죠(웃음).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왔어요. 넉넉한 집안이 아니라 부모님은 비행기표만 사주시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고 하셨어요. 정말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거죠. 공부를 워낙 못했으니 영어도 몰라서 맥도날드 주문을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영어를 잘하게 된 자신만의 비법이 있을까요.
어학원에 다닐 돈을 벌기 위해 세차를 하고, 중국집이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ELS(어학원)에서 공부하며 대학 입학 과정에 필요한 영어를 습득해야 했는데, 그때 어떻게 하면 회화를 빨리 배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역시 회화를 빨리 배우는 방법은 친구들을 만나는 거였어요. 그래서 기숙사 문에 ‘FREE BEER(맥주 무료)’라고 써 붙였더니 저희 방에 오려는 아이들이 줄을 서더라고요.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서 영어를 빨리 익히게 됐죠. 방에서는 항상 CNN을 틀어 24시간 영어권에 있게 했어요. 영화 ‘어 퓨 굿 맨’을 30번 봐서 대사를 몽땅 외워버렸고요.
영어를 아예 못 하던 학생에서 교수가 되기까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 공부를 잘하게 됐나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미국을 간 거라 미국인 친구들은 한 번 읽으면 이해하는 내용을 저는 10번은 읽어야 했어요. 도서관 딱딱한 의자에 10시간씩 앉아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공부했죠. 좋은 교수님을 만난 것도 큰 영향을 줬어요. 초중고 통틀어서 제 성적표는 ‘수’는커녕 온통 ‘양가양가’였어요. 대학에 입학해서 ‘어떤 수업을 들을까?’ 하다가 만만해 보이는 음악 수업에 등록했는데 실수였죠. 음악을 듣고 감상문을 5장이나 써내야 했어요. 음악 감상문은 상당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데, 영어 형용사를 잘 모르니까 짧게 몇 줄밖에 못 쓰겠는 거예요. 교수님이 제 감상문을 받고 “이게 뭐냐? 어느 나라에서 왔냐? 한국말은 쓸 수 있냐?” 물으시더니, 한글로 써오라고 하셨어요. 한글로 감상문을 써서 가니, 사전을 찾아가며 한 단어 한 단어 설명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손짓 발짓을 하면서 써온 감상문을 설명하는 걸 들으시곤 “감수성이 좋네. 이 수업은 영어 수업이 아닌 음악 수업이다. 너의 감수성은 충분히 좋다” 하시곤 A를 주셨어요. 그때 정말 감동받았어요. 정확하게 제 약점과 단점을 아시고 코칭을 해주신 거예요. 티칭이 아닌 코칭을요. 진정한 교육자는 가르치지 않고 코칭을 합니다. 이후 학습 동기가 유발됐어요. 그다음부터 늘 A를 받고 싶어서 열심히 했고, 정말로 줄줄이 A를 맞았어요.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달은 계기였을 듯해요.
교수님 덕분에 제 인생이 180도 바뀔 수 있다는 걸 경험했고, 학생들에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어요. 그때 컴퓨터를 전공했는데 ‘컴퓨터 공학을 교육에 활용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교육공학 석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지금 이 자리까지 왔네요.
“스스로에게 미안해지지 않으려면
도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도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2005년 멕시코의 낙후된 농장 마을로 봉사를 나갔다가 교육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하셨어요. 당시 멕시코의 교육 환경은 어땠나요.
집을 지어주는 봉사 활동에 따라갔다가 농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봤어요. 현지인들에게 “아이들이 학교에는 언제 가냐?”고 물었더니, 동네에는 학교가 아예 없다는 거예요.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에 ‘아이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제가 학교를 짓고 운영할 수는 없었으니, 공학 전공자로서 모바일 교육을 떠올리게 됐어요.
마침 모바일 회사 하나가 사업을 정리하면서 디바이스를 모두 처분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져다가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책을 읽어주고 노래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들이었죠. 그렇게 만든 디바이스를 그곳 아이들에게 나눠줬어요. 그 동네에는 라디오나 TV, 냉장고 같은 전자 기기가 없었어요. 당연히 모바일 디바이스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지 못했죠.
기기를 처음 본 아이들은 전원을 켜는 것도 모르니, 돌로 부수고 쪼개서 내부를 열어보기도 했어요. 그때 개입해서 “그게 아니야. 이렇게 사용해야 해”라고 하면 바로 수동적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요. 그랬더니 한 아이가 우연히 파워 버튼을 눌렀고 화면에 뭔가가 나오게 된 거예요. 그걸 보더니 아이들이 난리가 났어요. 먼저 켰던 아이가 다른 아이를 가르쳐주면서 스스로 익히더라고요. 그걸 ‘외계인 학습법’이라고 해요. 아이들을 능동형으로 성장시키려면 절대 가르쳐주지 않고 발견하게 하라는 이론이죠. 이후 짧은 시간에 아이들이 디바이스 프로그램 전문가가 됐어요. 그게 모바일 교육의 시초예요.
봉사도 하면서 교육 프로그램으로 마을을 발전시킬 수 있었겠네요.
이 내용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발표해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펀딩을 했는데 구글에서는 모바일 폰을 5천 대를 기증했죠. 멕시코, 인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됐어요.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2012년 실험적 온라인 수업 무크(MOOC)를 개발해 전 세계 1백70여 개국에 2만 명이 참여한 새로운 혁신 학교 모델을 디자인했죠. 2009년 비영리 국제교육재단 ‘시드 오브 임파워먼트’를 설립해 전 세계 자원봉사자들과 교육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어요. 운영 과정에서 질문형 학습 솔루션 ‘SMILE’을 개발했고, 도서 프로젝트인 ‘1001 스토리’도 진행했어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주고 싶은데 롤 모델이 없었어요. 그래도 ‘분명 스토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동네에서 누군가 평화를 위해 노력했거나 지혜를 준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수집하도록 했어요. 그걸 모아 오면 묶어서 책을 만들어 선물을 주는 거예요. 잘 쓴 아이들에게는 장학금을 줬고요. 지금은 글로벌 교육협력기관 ‘World Reader’를 통해 개발도상국 6백만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제작한 책을 무료로 보급하고 있어요.
봉사하며 가장 보람됐던 순간을 꼽는다면.
아이들에게 “항상 질문해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맞는 사회인가 질문해라”하고 강조해요. 자유롭게 질문하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죠. 질문이 없으면 사회가 바뀌지 않아요. 에티오피아에 가서 질문 교육법을 실시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아이가 “우리나라에도 여성의 인권을 법률로 규정한 조항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더라고요. 그 순간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긴 하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아이들이 자신들을 바꾸는 것을 넘어 과감히 이 나라를 바꾸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거죠. 질문을 통해서 리더십을 쌓아나가는 모습, 미래의 리더 모습을 봤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 아이들은 상당히 똑똑하고 리더십 교육을 했을 때도 반응이 좋아요. 그런데 기회가 없어요. 학부모들은 혁신 학교가 지어진다고 하면 반대합니다. 교육의 기회를 빼앗고 있어요. 학부모들은 스스로 먹고살 능력을 키우기에도 바쁜 시기에 ‘수능 점수’라는 올드한 생각에만 머물러 있어요. 교육 환경만 바꾸어도 전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인재들이 나올 텐데 안타까워요. 미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어요. 지금 존재하는 일자리의 반 이상은 없어지거든요.
최근 출간된 ‘다시, 배우다(RE:Learn)’를 통해서 ‘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어요. 성인들에게 재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새로운 기술들이 계속 등장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이런 세상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면 본인의 역량을 배가시킬 수 있죠. 그동안 경험해보지 않았던 영역으로 도전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게끔 해야 해요. 저는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림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상당히 많아요. NFT를 만들어볼까, 생각도 하고요. “스스로에게 미안해지지 않으려면 내가 가진 열망에 따라 도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열망이 남아 있는 채로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 몸이 안 따라서 후회할 거예요. ‘내가 그때 왜 안 했을까?’ 하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오늘 시작하고, 오늘 이륙하세요.
사진제공 폴 김
글 두경아
집을 지어주는 봉사 활동에 따라갔다가 농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봤어요. 현지인들에게 “아이들이 학교에는 언제 가냐?”고 물었더니, 동네에는 학교가 아예 없다는 거예요.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에 ‘아이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제가 학교를 짓고 운영할 수는 없었으니, 공학 전공자로서 모바일 교육을 떠올리게 됐어요.
마침 모바일 회사 하나가 사업을 정리하면서 디바이스를 모두 처분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져다가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책을 읽어주고 노래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들이었죠. 그렇게 만든 디바이스를 그곳 아이들에게 나눠줬어요. 그 동네에는 라디오나 TV, 냉장고 같은 전자 기기가 없었어요. 당연히 모바일 디바이스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지 못했죠.
기기를 처음 본 아이들은 전원을 켜는 것도 모르니, 돌로 부수고 쪼개서 내부를 열어보기도 했어요. 그때 개입해서 “그게 아니야. 이렇게 사용해야 해”라고 하면 바로 수동적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요. 그랬더니 한 아이가 우연히 파워 버튼을 눌렀고 화면에 뭔가가 나오게 된 거예요. 그걸 보더니 아이들이 난리가 났어요. 먼저 켰던 아이가 다른 아이를 가르쳐주면서 스스로 익히더라고요. 그걸 ‘외계인 학습법’이라고 해요. 아이들을 능동형으로 성장시키려면 절대 가르쳐주지 않고 발견하게 하라는 이론이죠. 이후 짧은 시간에 아이들이 디바이스 프로그램 전문가가 됐어요. 그게 모바일 교육의 시초예요.
봉사도 하면서 교육 프로그램으로 마을을 발전시킬 수 있었겠네요.
이 내용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발표해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펀딩을 했는데 구글에서는 모바일 폰을 5천 대를 기증했죠. 멕시코, 인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됐어요.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2012년 실험적 온라인 수업 무크(MOOC)를 개발해 전 세계 1백70여 개국에 2만 명이 참여한 새로운 혁신 학교 모델을 디자인했죠. 2009년 비영리 국제교육재단 ‘시드 오브 임파워먼트’를 설립해 전 세계 자원봉사자들과 교육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어요. 운영 과정에서 질문형 학습 솔루션 ‘SMILE’을 개발했고, 도서 프로젝트인 ‘1001 스토리’도 진행했어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주고 싶은데 롤 모델이 없었어요. 그래도 ‘분명 스토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동네에서 누군가 평화를 위해 노력했거나 지혜를 준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수집하도록 했어요. 그걸 모아 오면 묶어서 책을 만들어 선물을 주는 거예요. 잘 쓴 아이들에게는 장학금을 줬고요. 지금은 글로벌 교육협력기관 ‘World Reader’를 통해 개발도상국 6백만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제작한 책을 무료로 보급하고 있어요.
봉사하며 가장 보람됐던 순간을 꼽는다면.
아이들에게 “항상 질문해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맞는 사회인가 질문해라”하고 강조해요. 자유롭게 질문하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죠. 질문이 없으면 사회가 바뀌지 않아요. 에티오피아에 가서 질문 교육법을 실시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아이가 “우리나라에도 여성의 인권을 법률로 규정한 조항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더라고요. 그 순간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긴 하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아이들이 자신들을 바꾸는 것을 넘어 과감히 이 나라를 바꾸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거죠. 질문을 통해서 리더십을 쌓아나가는 모습, 미래의 리더 모습을 봤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 아이들은 상당히 똑똑하고 리더십 교육을 했을 때도 반응이 좋아요. 그런데 기회가 없어요. 학부모들은 혁신 학교가 지어진다고 하면 반대합니다. 교육의 기회를 빼앗고 있어요. 학부모들은 스스로 먹고살 능력을 키우기에도 바쁜 시기에 ‘수능 점수’라는 올드한 생각에만 머물러 있어요. 교육 환경만 바꾸어도 전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인재들이 나올 텐데 안타까워요. 미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어요. 지금 존재하는 일자리의 반 이상은 없어지거든요.
최근 출간된 ‘다시, 배우다(RE:Learn)’를 통해서 ‘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어요. 성인들에게 재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새로운 기술들이 계속 등장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이런 세상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면 본인의 역량을 배가시킬 수 있죠. 그동안 경험해보지 않았던 영역으로 도전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게끔 해야 해요. 저는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림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상당히 많아요. NFT를 만들어볼까, 생각도 하고요. “스스로에게 미안해지지 않으려면 내가 가진 열망에 따라 도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열망이 남아 있는 채로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 몸이 안 따라서 후회할 거예요. ‘내가 그때 왜 안 했을까?’ 하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오늘 시작하고, 오늘 이륙하세요.
사진제공 폴 김
글 두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