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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까.." 고3 학생 고민에 '진심'의 편지를 쓰는 남자

JOB화점 2021-08-05 10:33
우리는 누구나 위로 받고 싶은 순간이 있다. 상실이나 좌절, 슬픔에 빠졌을 때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온기 어린 말이 필요한 그런 순간. 소설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샛노란 우체통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온기'에서 운영하는 온기우편함. ⓒ온기
사단법인 ‘온기’는 벌써 5년 째 이 ‘온기우편함’을 운영하고 있다. 익명의 누군가가 보내온 고민 편지에 위로와 응원의 말이 담긴 손편지를 직접 보내주는 것이 ‘온기’에서 하는 일이다. 요즘에는 코로나19로 우울감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 일주일에 100통 넘는 익명의 고민이 도착한다고.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로 사회 곳곳에 따뜻함을 전하고 있는 ‘온기’의 조현식 대표(31)를 잡화점이 만나봤다.
안녕하세요, 5년동안 '온기우편함'을 운영하고 있는 조현식입니다. '온기'는 익명으로 보내주신 고민에 손편지로 답장을 전하는 심리지원 활동을 합니다.
조현식 대표 제공
텅 빈 거리에 온기우편함을 처음 세운 날
처음 어떻게 온기우편함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책을 읽으며 시작됐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과거의 잡화점에 도착한 편지에 미래의 인물들이 답장을 하는 내용이에요. 이 판타지적 요소가 우리 사회에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많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우리 사회에 공감이 담긴 연결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2017년 2월 25일. 조 대표는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의 돌담길에 처음으로 온기우편함을 세웠던 그 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대학생이던 조 대표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편지를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우편함을 설치했다. 편지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첫 주에만 50통이 넘는 고민편지가 도착했다고.

프로젝트성으로 진행했던 온기우편함이었지만 점차 편지가 늘었다. 편지가 많아지자 손글씨로 답장을 쓰는 자원봉사자가 늘었고, 자연스레 조직의 형태가 갖춰졌다. 그렇게 5년째, ‘온기’는 비영리 사단법인이 됐다.

“처음에는 ‘온기’가 단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편지가 올 줄도 몰랐고, 한 사람에게 작은 편지를 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한 때) 회사도 다니고 월급의 절반 이상을 온기우편함에 쓰면서, 그렇게 조금씩 지금의 상황까지 끌고 온 것 같습니다. 사실 아직도 온기는 작은 단체이기에 갈 길이 멉니다.”
삼청동 돌담길 온기우편함. ⓒ온기
“예전에는 화려한 직업이 갖고 싶었습니다.”
‘온기’ 설립 전, 조 대표는 한양대학교 국제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직업을 갖고 싶었기 때문에 비영리사단법인을 운영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고. 대학시절 공부한 것들이 아깝지 않냐고 묻자 조 대표는 “후회한다”고 답했다.

“공부한 시간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조금 더 이른 나이에 소셜 섹터, 비영리 분야에서 일해보지 못 하고 온기우편함을 운영하게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이 분야에 경험이 없어서 실패와 좌절을 반복했거든요.

예전에는 화려한 직업,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직업을 갖고 싶었습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어요. 그런 직업들은 제가 진짜 원하던 게 아니라 남들이 좋다고 해서 따라갔던 거였죠.”

온기를 운영하면서 어떤 좌절과 실패가 있었나요.

“초창기에는 우편함 설치를 위해 (관공서 등에) 문의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편함이 파손되면 사비로 메꿔야 했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에 대해 고민하고 좌절했습니다. ‘온기’는 남을 돕는 일을 하는 단체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 내가 ‘온기’를 대표할 만큼 따뜻한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습니다. 사실 그 고민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다만 (5년간) 일을 해오면서 지금은 이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은 생겼습니다.”
손편지에 ‘위로’와 ‘온기’를 담아 보내다
‘온기’에는 고민편지를 읽고 직접 손글씨로 답장을 적어 보내는 자원봉사자 ‘온기우체부’들이 200여 명 있다. 조 대표 역시 ‘온기’의 대표이자 우체부로 일하는 중이다. 지금까지 온기우체부들이 보낸 답장은 1만통이 넘는다. 조 대표는 “아날로그의 힘인 ‘진심’을 알기 때문”에 불편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손편지를 고집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오롯이 편지 받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한 자, 한 자 글을 써내려 간다는 것. 답장 한 통에 1시간 반정도의 시간을 들인다. 그는 “손글씨에 담긴 시간과 마음이 진심이 되기에, 익명의 사회구성원 서로가 진심으로 연결되고 위로를 주고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온기우체부들은 익명의 고민에 손편지로 답장을 쓰는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 ⓒ온기
고민편지는 일주일에 몇 통 정도 오나요? 어떤 고민이 많은지 궁금합니다.

“일주일에 100~120통 정도 도착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은 고민은 취업과 진로에 관련한 고민이었는데, 코로나19 이후에는 무기력함과 우울감, 가족과 관련된 고민이 우편함으로 많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물론 친구들과 장난으로 적어 보낸 편지도 있고, 로또 번호를 알려달라는 편지들도 가끔 있어요.”

기억에 남는 편지와 답장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최근에 답장을 전했던 고등학교 3학년 온기님의 편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소심하고, 걱정이 많고, 꿈이 없어서 다른 친구들보다 뒤쳐지는 것 같고… 가끔씩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까 생각하게 된다고 적어준 편지였습니다. 저도 참 많이 소심하고, 지금도 걱정이 많아서… 온기님에게 주변에 아무도 “괜찮아”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꼭 괜찮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참 많이 소심한 사람이라서요. 제가 겪었던 소심해서 하지 못 했던 일들을 적으며 ‘조금 커보니 소심함이 세심함이 되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고 적었습니다. 학창시절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잘 하는 게 없던 제 이야기를 함께 적었고 무엇보다… 온기님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잘 하고 있다고, 오늘 하루도 잘 해나가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어서 몇몇 별들은 빛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빛을 내고 있다고, 온기님도 세상에 한 분 뿐인 소중한 빛을 내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적었습니다.”

온기우체부로 활동하는 분들은 지금 얼마나 되고, 또 어떤 분들인가요?


“온기우체부로 활동해주시는 분들은 현재 200분 정도 입니다. 20대 대학생분들부터 60대 어머님까지 활동하고 계십니다. 학생, 교사, 디자이너, 소방관,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고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이자, 친구이기도 합니다.”

지난 6월 방송된 tvN '유퀴즈온더블럭'에는 온기우체부로 봉사하고 있는 노기화 님이 출연해 화제가 됐다. 사진=유퀴즈온더블럭 방송 화면
온기우체부 분들께서 답장을 쓸 때 신경 쓰는 부분도 있으실 것 같아요.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나에게 정답이 다른 사람에게는 정답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하지 마세요 같이 정답을 강요하는 걸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고민편지에 오히려 위로 받으신 적도 있는지 궁금해요.


“(온기우편함에는) 저희를 응원해주시는 편지도 있어요. 온기우체부가 있어서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고, 그곳에 오래 머물며 온기를 지켜달라고 적어주시는 편지를 받을 때면.. 이 일을 하기를 참 잘 했다고, 위로와 따뜻한 힘을 받아요.

대표님도 고민편지를 보내신 적이 있나요?


“보낸 적 있습니다. 미래와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였어요. 그 때 온기우체부 님께 '나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위로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또 하루가 끝나기 전, 오늘 내가 살아온 일들을 메모한다던지 내일의 내 모습을 글로 적는다던지.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줬는데요. 때로는 맘 속이 아니라 내뱉거나 글로 적었을 때 확실해지는 것들 것 있잖아요? 저도 거기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다음 ‘온기’를 전하러
얼마 전 비영리 사단법인 등록을 마친 ‘온기’는 더 넓은 곳으로 온기를 퍼뜨리기 위해 준비 중이다. 서울에만 설치되어 있는 온기우편함을 지방으로 확장하는 것도 목표다. 최근에는 수많은 익명의 고민과 답장을 담은 도서 출간을 진행 중이다. 출간 비용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모금했는데, 목표치의 27배가 넘는 금액이 모였다. 조 대표는 “편지를 보내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민편지와 답장을 모아 만든 온기우편함 도서. ⓒ온기
비영리 사단법인 등록을 마치셨는데, 온기의 방향성에도 변화가 생길까요?

“온기의 방향성은 처음 그대로, ‘진심’일 거에요. 비영리 사단법인 등록을 한 건, 이 진심을 지켜나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활동이 오래도록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문제도 무시할 순 없을 텐데요.


“사실 아직은 온기를 직업으로 삼아서 직원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의 후원이 들어오고 있지는 않아요. 저 역시 임금으로서 받는 고정적인 돈은 없습니다. 다만 서울시나 비영리단체 지원 사업에서 받는 지원금으로 비정기적인 임금 충당을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누군가는 이 일을 이끌어 가야 하기에, 직업으로서 ‘온기’를 이뤄가는 과정에 있는 거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저희가 하는 일에 마음을 전해 주시는 분들이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나중에) 후원금에 여유가 생기면 사업이나 활동에 사용할 예정입니다. 후원금이 온전히 환원 활동에 쓰이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꼭 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싶고, 할 계획이신가요?


“우리 사회에 심리적 안전망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에게는 전문적인 위로도 필요하지만, 일상에서의 위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받는 공감도 필요한 것 같아요. 온기우편함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안전망이 돼서, 우리 사회가 아직 살만하다는 걸, 심적으로 건강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전하고 싶어요.”

인터뷰 내내 ‘진심’이라는 말을 많이 쓰셨어요. 대표님이 말하는 진심이란 무엇인가요.

"음..."

너무 추상적인 질문을 드렸나요.


"하하, 아니에요. 손편지를 기준으로 답할게요. 답장받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편지를 쓰는 것이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편지를 쓸 때 한문장 한문장이 조심스럽습니다. 누군가의 고민을 가볍거나 섣부르게 대하지 않을지 생각하면서요. 그게 진심의 과정들이 아닐까요."

황지혜 기자 hwangj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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