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야 육수야? 한국 생활 15년차 외국인의 실수담

동아일보
동아일보2022-01-21 10: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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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난 영국 사람인데도 홍차가 맛없고 카페인에 예민한 체질이라 커피도 잘 안 마시고, 뜨거운 음료 자체를 잘 마시지 않는다. 그래도 커피 쿠폰을 사용하려고 오랜만에 동네 커피숍에 간 적이 있다. 한참 전에 받았는데 곧 사용기한이 만료되기 때문이었다.

문 앞에 비치된 손 소독제를 짜 손을 비벼대며 핫초코와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기다리면서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매장 곳곳에 손 소독제같이 생긴 시럽 통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통에 크게 ‘시럽 통’이라고 써 붙인 쪽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소독제 통과 시럽 통을 혼동해서 고객에게 잘못 서빙한 사례가 신문에 나기도 했었다. 우리는 뭔가에 익숙해지면 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습관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은 나도 정말 어디로 외출하기만 하면 하루에 몇 번씩 거의 자동으로 펌프질을 하게 된다. 버스 승하차 시 비치되어 있는 소독제를 보면 자동으로 펌프를 눌러 손을 비벼대고, 마트에 들어갈 때도 손 소독제를 눌러 짜서 손뿐만 아니라 카트 손잡이까지도 열심히 소독하고 들어간다. 요즘엔 어디를 가도 손 소독제가 있으니 투명한 하얀 병에 펌프가 튀어나와 있는 모습을 한 물건을 보기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펌프를 눌러댄다.

커피숍과 시럽 통의 연관성보다 커피숍과 손 소독제의 연관성이 더 커져버려서 시럽 통을 시럽 통이라고 써 놓지 않으면 시럽 통마저 손 소독제로 오해하는 새로운 버릇은 유독 한국에서만 생기는 문화적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한국에서 새로 터득한 문화적 반사작용이 만들어낸, 혹은 그의 부족으로 빚은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고 아마도 거의 모든 외국인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이런 경험들을 해 봤을 것 같다. 한국의 빵 가게에서 초콜릿처럼 보이는 빵을 사 들고 와서 팥빵의 오묘한 맛을 깨달았을 것이고, 민트 아이스크림인 줄 알고 녹차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얼떨결에 녹차 잎의 효능을 경험해 봤을 거고, 토마토소스인 줄 알고 매운 참치 통조림을 샀다가 고추의 매운맛을 봤을 거다. 이런 경험들은 아마도 외국인이라면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겪는 통과의례일 것이다.

지금은 한국어를 잘하니까 이런 경험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문화 초년생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한 예로 한국에서는 식당에서 반찬과 물이 서비스로 나온다. 영국 같은 경우는 식당에서 대부분 물을 시켜 먹어야 하고, 아니면 수돗물을 달라고 따로 부탁해야 한다. 내가 한국에서 눈치로 터득한 여러 식탁 예절 중 하나는, 식당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난 후 반찬과 물이 식탁에 도착하면 보통은 식사하는 사람들 중에 한두 사람이 다른 합석자의 물을 따라주고 수저를 챙기는 무언의 책임을 수행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날 우리 팀의 점심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우리 팀 막내가 수저랑 냅킨을 꺼내는 사이 나는 내 앞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테이블에 있던 일행 중 그때까지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는데 누군가 내가 따라준 물을 마시고는 주전자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부대찌개의 육수를 물과 혼동했다고 나한테 핀잔을 주면서 자기 쪽에 있던 물통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사실은 나도 물을 따라주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항상 맹물만 나오는 것은 아니고 가끔은 보리차도 나오고 누룽지 물도 나오니까 나름대로 자신 있게 물을 따랐던 것인데, 너무 자신감에 차 있어도 실수를 하는 모양이다. 이전에도 중국에 놀러 갔을 때 물 잔처럼 보이는 컵에 담긴 액체가 고량주인 줄도 모르고 마셨다가 고생한 적이 있었다. 마시는 물 하나에도 그깟 물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많은 역사적 이야기와 문화적 사연이 엉켜 있는 듯하다.

손 소독제와 시럽 통, 초콜릿과 팥, 민트와 녹차, 토마토소스와 고추장, 찌개 육수와 마시는 물까지 아마도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는 모양이다. 여러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국에 살고 있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인 내가 생각하게 되는 교훈은 한국 생활에 절대 안주하지 말자는 것이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15년째인 베테랑이지만 이렇게 잘난 척하는 원숭이도 여전히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꽤 있으니까 말이다.

폴 카버 영국 출신·유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