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송송, 등골에 줄줄…땀 빼며 먹는 초겨울 별미 '어죽'

신동아
신동아2021-11-18 17: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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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더니 부쩍 추워졌다. 한 해의 끝을 향해 계절과 내가 함께 달려가고 있음을 싸늘한 바람이 일깨워준다. 며칠 전 서늘한 인쇄소 창고에서 친구들과 손발을 맞춰 단순 작업을 했다. 아침에 시작한 일이 밤이 깊어서야 마무리돼 백반집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고생한 친구들과 경기 파주에 있는 유명한 어죽집으로 달려가 뜨끈한 국물에 노동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실없이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 게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난다. 해넘이를 핑계 삼아, ‘위드 코로나’를 핑계 삼아 그리운 얼굴들 한 번 모아보고 싶다. 보글보글 익어가는 음식을 앞에 두고, 하얗게 김이 낀 낭만적인 창문 옆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워보고 싶다.
시원 칼칼 향기로운 어죽의 매력
민물고기를 푹 끓여 만든 육수에 향신 채소를 넣고 밥을 말아 걸쭉하게 익혀내는 어죽. [한국관광공사 제공]
인쇄소 볼일로 파주에 갈 때면 어죽을 포장해오곤 한다. 내가 먹기도 하고, 보고 싶은 사람 집에 들러 주고 가기도 한다. 어죽은 말 그대로 물고기로 끓여 만든 죽이다. 이름 때문에 질색하며 안 먹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한번 맛보면 그 결심이 납작하게 접히기 일쑤다.

어죽은 큰 강줄기가 있는 지역이라면 어디서나 먹는다. 내가 처음 어죽을 맛본 건 충남 금산 금강 근처였다. 민물고기를 잡아 푹 끓인 물을 체에 내려 고운 국물만 받는다. 여기에 대파, 마늘, 생강 같은 향신 채소를 넣고 고추장을 풀어 끓인다. 그 다음 밥이나 국수를 넣고 걸쭉하게 익혀 낸다. 되직한 국물에서 깊은 감칠맛이 나며, 얼큰함 가운데 구수함이 살아 있고 향도 좋다. 금산의 어죽에는 인삼이 들어가 특유의 향도 은은하게 난다.

이날 이후 모르는 동네에 가도 어죽집이 있으면 들어가 한 그릇 먹는데 대체로 맛있다. 어떤 집은 된장을 풀어 구수한 맛을 살리고, 어떤 곳은 감자를 한 덩이 넣기도 한다. 국물 농도, 재료, 맛이 집집마다 달라 먹는 재미가 좋다. 내가 자주 가는 파주 어죽집은 민물새우로 국물을 내 시원하고, 매운맛을 살려 칼칼하며, 깻잎을 듬뿍 넣어 향기롭다.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이다.
바다와 민물을 오가며 사는 작은 물고기 꾹저구로 만든 꾹저구탕. [동아DB]
어죽과 추어탕 사이 어디쯤에 있는 꾹저구탕과 짱뚱어탕은 지역 별미로 꼽을 수 있다. 꾹저구는 바다와 민물을 오가며 사는 농어목 망둑엇과의 작은 민물고기로 뚜구리, 뿌구리, 뚝저구, 꾸부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내장을 뺀 꾹저구를 푹 삶아 고운체에 걸러 국물을 내고 고추장을 풀어 끓이는 것은 어죽과 비슷하다. 그러나 국물 맛이 훨씬 달고 시원하다. 바다 맛이 섞여 그런가 싶다. 꾹저구탕 국물에는 으레 버섯을 듬뿍 넣고, 밥은 커다란 감자를 섞어 지어 준다. 노란 알감자를 빨간 국물에 으깨 넣고 함께 떠먹는 맛이 일품이다.
전남 순천의 짱뚱어탕. 고소한 짱뚱어 육수에 된장을 풀고 시래기 등을 넣어 끓인다. [동아DB]
고소한 짱뚱어와 된장, 시래기 어우러진 향토 음식
아주 깨끗한 갯벌에서만 사는 짱뚱어는 한참 남쪽으로 내려가야 맛볼 수 있다. 전남 순천·영암·보성 같은 지역의 별미인데, 짱뚱어가 점점 귀해져 요리도 함께 귀해지는 상황이다. 짱뚱어는 겨울잠을 자기에 지금 이맘때 잡히는 것이 가장 고소하고 맛이 좋다. 짱뚱어로 밑국물을 낸 다음 육수를 거르는 데까지는 다른 어죽과 매한가지다. 단 이번에는 된장을 풀고 시래기를 넣다. 우거지나 무를 함께 넣기도 한다. 묵은 채소에서 우러나는 겨울 맛이 더해져 웅숭깊고 진하디 진하다.

파주에서 시작해 꾹저구가 있는 강원 속초를 찍고, 다시 금강을 따라 내려간 다음 남쪽 갯벌에 들렀으니 동해 맛도 짚어보고 싶다. 여럿이 ‘우우’ 먹는 맛은 모리국수만한 게 없을 것 같다. 국물 맛을 내는 미더덕과 콩나물, 홍합 같은 조개류는 고정 재료다. 생선은 때마다 달라진다. 크고 깊은 냄비에 해산물과 채소를 넣고 푹 끓인다. 고추장, 고춧가루를 섞어 맛을 내고 마지막에 칼국수를 익혀 먹는다. 국수에서 나온 전분이 국물에 퍼지고, 국수가 육수를 삼켜 점점 걸쭉해진다. 너나 할 것 없이 젓가락질을 서둘러 가며 먹게 된다.

오들오들 떨며 식탁 앞에 앉아도 모리국수를 먹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송, 등골까지 땀이 졸졸 흘러 몸과 정신이 개운해진다. 나라면 느릿느릿 대화가 오가는 술자리 안주보다는 다음날 눈이 번쩍 뜨이는 해장 음식으로 모리국수를 택하겠다.
자연산 홍합으로 끓인 섭국. 얼큰하고 뜨끈한 맛이 일품이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마지막으로 혼자 먹어도 쓸쓸하지 않은 겨울 음식, 섭국이 있다. 섭은 자연산 홍합을 말한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라도 홍합탕을 먹어본 이라면 시원한 감칠맛이 떠오를 것이다. 섭은 우리가 흔히 보는 홍합보다 훨씬 크고 살집도 여물다. 거친 바다에서 살아온 만큼 몸에 밴 맛이 진해 국물이 한결 깊고 시원하다.

섭을 끓인 국물에 대파, 미나리, 양파 같은 향긋한 채소를 넣고 고추장을 풀어 푹 끓인다. 섭이 워낙 크니 살은 작게 잘라 넣는다. 밥과 달걀, 부추를 넣고 한소끔 끓여 완성한다. 진한 국물에 배어든 갖은 채소의 향과 달걀의 고소함, 쫄깃한 섭을 한 숟가락에 푹 떠서 맛볼 수 있다. 그릇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도 쉬 식지 않아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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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2021년 11월호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