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현충원의 기원

동아일보
동아일보2021-07-01 11: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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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혹독한 전쟁에 상처를 입은 우리나라의 유해발굴단은 고고학과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세계적으로 앞서가고 있다. 그렇게 사라져간 전사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전통은 먼저 간 우리 가족과 그 은인을 추모하는 인간의 본성이자 미래에 대한 다짐이다.
전사의 상징인 낡은 칼
알타이 초원의 사슴돌은 낡은 칼과 함께 초원의 전사를 추모하는 비석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전쟁 영화나 포스터를 보면 전장에 총을 꽂고 그 위에 철모를 걸어 시신이 있는 곳을 표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시원은 약 3000년 전에 찾을 수 있다. 당시 고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전사들은 낡은 칼을 꽂아서 전사자를 위로했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역사서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공통적으로 초원의 사람들이 낡은 칼을 전사의 상징으로 숭배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이름은 각각 ‘아키나케스’와 ‘경로(徑路)’인데, 이건 사실 같은 말을 다르게 음차한 것이다. 

이 낡은 칼의 풍습은 그리스로 건너가서 전쟁의 신인 아레스(Ares)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고인돌 앞에 비파형동검을 꽂아두고 숭배하는 풍습이 발견된다. 화려한 황금 보검이 아니라 날이 빠진 낡은 칼을 꽂아 둔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고대부터 시작된 유목민들의 관념으로, 저승과 이승을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자를 위한 유물은 일부러 부러뜨리거나 깬 뒤에 넣는 경우가 무덤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카자흐스탄에서 발견된 아키나케스는 전사를 추모하는 칼로 약 28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인욱 교수 제공
전쟁에서 희생된 왕이나 장군의 시신은 정성을 다해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묻었다. 2500년 전 러시아 알타이 초원의 대형 무덤인 파지리크 고분을 발굴하자 흥미로운 인골이 발견됐다. 무덤의 주인공인 왕족은 이미 미라가 되어 있었는데, 머리의 가죽은 벗겨지고 대신 소가죽으로 그 머리를 덧댄 상태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적장을 죽이면 그 해골로 술잔을 만드는 풍습이 있다. 하지만 정착민이 아닌 유목민들에게는 목을 베는 대신 머리 가죽을 벗겨 자기가 타는 말의 꼬리에 다는 풍습이 있었다. 파지리크 고분의 왕족은 친히 앞장서서 전쟁에 나섰다가 희생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유해를 고이 모셔와 정성스레 꿰맨 것이다.

전사의 유골은 당시 주요한 전리품이 되기도 했다. 정복해야 할 도시나 마을이 없는 유목민들은 적의 무덤을 찾아 인골을 훼손해야 비로소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무덤 속 귀금속은 전리품으로 챙기기도 했다. 실제로 흉노의 고분을 발굴하면 이미 도굴이 되어서 인골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고구려 vs 당나라 ‘유골 전쟁’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뒤 곳곳에 적의 시신을 모아서 일종의 전승기념탑인 ‘경관’을 세워 사기를 고취했다. 고구려의 전쟁 피해도 컸을 터이니, 이 경관은 고구려 전사를 추모하고 중국 세력을 막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영류왕 14년(631년)에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던 수나라 군사 유골을 찾아와 매장해 주었다. 당나라가 수나라의 전쟁을 굳이 챙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아서 당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는 당이 수나라의 복수를 표방하고 결전을 예고한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책에도 전쟁에 희생된 병사들의 장례를 치르고 남은 가족들의 생계 보조를 명령했던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 정성은 머나먼 타향으로 떠나간 군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고려 현종은 “길가에 방치된 국경수비군 유골은 집으로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현종 5년·1014년)고 했다. 육진사군을 개척해 북방으로 나아간 세종 때에도 “국경에 나가 전사하거나 병사하면 모두 시체를 찾아서 메고 돌아와 장사하라”(세종 21년·1439년)는 엄명이 있었다. 엄청난 군비가 들어가는 북방 정벌에도 자신의 군사를 사랑하고 지키는 마음은 결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영웅의 흔적 찾는 유해발굴단
대한민국 국립현충원은 서울 한강변 동작동에 자리 잡았다. 동작(銅雀)은 ‘구리참새’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름은 아닌데, 조선시대에 구릿빛 자갈이 많아 붙여진 ‘동재기’라는 나루터에서 나왔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동작’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한다. 조조가 땅속에서 구리참새가 나온 곳을 상서롭게 여겨서 전쟁으로 희생된 젊은 군인들을 위로하는 궁전 ‘동작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지만, 조조가 ‘동작대’를 만든 것은 사실이고, 지금도 중국 허베이성에 남아 있다. 6·25전쟁 이후 현충원을 건립하기 위해 10군데 이상을 살펴보다가 동작동이 최종적으로 선정된 것이 혹시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이름과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지만 아쉽게도 확인할 길은 없다.
국립현충원 유해발굴단이 발굴해 신원이 확인된 국군의 유해 위에 태극기가 덮여 있다. 강인욱 교수 제공
국립현충원에는 2007년 정식 기구로 출범한 유해발굴단이 있다. 21세기 들어 새롭게 영웅을 추모하는 방법이다. 유해발굴단 작업은 유물을 찾는 고고학과 같다. DNA를 비롯한 첨단 기법으로 각 인골의 신원을 판별한다. 물론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고고학은 유물을 발굴하지만, 유해발굴단은 영웅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20세기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전쟁 피해를 입었다. 유해 발굴 전통이 가장 먼저 발달한 나라는 미국이다. 한국은 비록 역사는 짧지만 빠르게 정착되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유럽과 수많은 희생을 겪은 러시아 같은 나라들도 유해 발굴에는 소홀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전후 상처를 딛고 세계의 선두에 선 한국은 전사자를 기념하는 길에서도 앞서나가는 셈이다.

우리의 유해를 찾는 것은 물론 우리와 겨루었던 적의 유해도 인도적 차원에서 찾아 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고려 우왕은 우리 백성은 물론 적이었던 왜구들의 시신도 거두어 줄 것을 명했다. 적이라도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은 존중해야 한다. 문명화된 21세기 사회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표방하며 무기를 과시하는 대신 우리를 위해서 희생한 영웅들을 기리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어느덧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전쟁은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 역사에서 전쟁이 없는 시절은 없었다. 그들을 잊고 전쟁도 잊는 나라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뼈 한 조각에 정성을 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