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을 지키고 있는 '페르시아 사람'

동아일보
동아일보2021-07-01 10: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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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옛 이름은 페르시아죠. 기원전 6세기 후반 고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약 200년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대영토를 지배했던 페르시아. 로마에 앞서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던 나라입니다.

우리는 삼국시대 때부터 페르시아와 교류를 했습니다. 천년고도 경주에 가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답니다.
신라왕을 지키고 있는 페르시아인
경주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 얼굴이나 옷차림으로 보아 이 무인은 서아시아 페르시아 계통이다.
경주시 외동읍엔 통일신라 원성왕(785∼798년 재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괘릉이란 이름이 붙었지요. 봉분 앞에는 무인(武人) 조각상 한 쌍(각 높이 257cm)이 서 있습니다. 8척이 넘는 키에 육중한 몸집, 한 손은 불끈 쥐고 다른 한 손은 칼을 힘차게 움켜쥔 모습이 역동적이고 무시무시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풍모가 아닙니다. 깊숙한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귀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 아랍식의 둥근 터번,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 전체적으로 서역인(西域人) 풍모입니다.

서역은 중국의 서쪽 지역을 일컫는 용어였어요. 중국 당(唐)나라 때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이란), 아랍까지 포함했습니다. 이 무인상은 서역인 중에서도 서(西)아시아풍입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페르시아 계통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헌덕왕릉의 무인상(9세기), 흥덕왕릉의 무인상(9세기), 서악동 고분(8, 9세기)의 묘실 문 서역인상 등 경주에는 이 같은 서역인 조각이 꽤 많습니다.
어떻게 서역인을 조각했을까?
통일신라 고분 모서리 기둥에 조각된 ‘폴로 스틱을 든 페르시아인’.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폴로(격구)는 통일신라의 인기 스포츠였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떻게 해서 서역인이 신라 왕릉을 지켜 주는 무인석의 주인공으로 채택되었을까요? 신라 사람들은 서역인들의 무시무시한 풍모가 악귀를 쫓아 무덤을 지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겁니다. 그럼, 실제로 서역인을 보고 조각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서역인들이 실제로 신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왕국과 도로 총람’을 보면 ‘중국의 맨 끝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들이 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신라다. 신라는 금이 많이 나고 기후와 환경이 좋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교도가 신라에 정착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서역인들이 신라의 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경주를 찾았던 것이지요.
인기 스포츠 폴로를 즐기는 페르시아인
경주 괘릉 전경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엔 사각 기둥의 돌조각(9세기)이 있습니다. 이 돌기둥은 경주시 구정동 석실분(돌방무덤)의 모서리에 세웠던 것이죠. 돌기둥 한쪽 면엔 방망이를 어깨에 걸쳐 맨 무인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무덤 침입자를 막기 위해 방망이를 들고 있는 것 같은데, 잘 들여다보니 방망이의 끝이 살짝 휘어져 있네요. 폴로 스틱입니다. 무인은 왼다리를 약간 들고 동적(動的)인 포즈를 취하고 있군요. 그런데 이 무인도 서역인 풍모입니다. 역시 페르시아인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폴로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격구(擊毬)입니다. 이 페르시아인은 왜 폴로 스틱을 쥐고 있는 걸까요? 페르시아에서 유행했던 폴로가 실크로드와 중국 당나라를 거쳐 통일신라 경주에 상륙한 겁니다. 무덤에까지 폴로 스틱을 조각한 걸 보면, 무덤 주인공이 폴로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모양이군요. 폴로의 인기는 고려 초기까지 이어졌습니다.

9, 10세기 전후, 폴로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페르시아, 중국, 일본 등 실크로드의 전 구간에서 모두 인기였습니다. 중국에선 폴로를 즐기는 모습의 그림과 조각상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당나라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에서는 여성들도 많이 즐겼습니다.
경주에서 만나는 페르시아 문화
페르시아의 흔적은 또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인 문양석(8세기)을 볼까요? 여기엔 연주문(連珠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페르시아에서 발원해 경주로 들어온 겁니다. 연주문은 구슬을 원형으로 이어 붙인 모습의 문양을 말하지요.

황남대총, 천마총 등 경주 도심의 5, 6세기 대형 고분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에서 제작한 유리 제품들이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신라 사람들이 로마와 페르시아의 유리그릇을 수입해 사용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자, 한번 상상해 보세요. 통일신라시대 경주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신라 사람들이 페르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폴로를 즐기고, 로마와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유리그릇을 사용하는 모습을. 당시 경주는 이렇게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도시였고, 우리와 이란의 교류는 무척이나 오래됐답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