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의 마음을 나누다, 칠곡할매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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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2021-06-15 13: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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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우리의 문화 유산 칠곡할매서체
다양한 활용 선보여
[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칠곡군이 특별한 의미가 담긴 폰트를 무료 다운로드 제공한다. 칠곡군이 제공하는 폰트는 우리네 할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칠곡할매서체’다. 이름 그대로 경상북도 칠곡군에 살고 계신 할머니들의 손글씨를 통해 완성된 폰트이다.
칠곡군에서 제공한 칠곡할매서체 5종의 모습 /윤미지 기자
예로부터 글씨는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라 일컬었다. 우리 전통문화에서도 서예란 마음을 가다듬고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써 내려가는 것으로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생각과 운명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난해 12월 첫 공개된 칠곡할매서체에도 할머니들의 마음이 보인다. 한글을 깨우치고 마음속 담아둔 이야기를 시작한 할머니들의 삶과 생각이 서체에 그대로 담겨 있으며 우리네 정겨운 시골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어 잠시간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다. 무궁무진한 폰트의 세계 속에서 특별히 주목받고 있는 칠곡할매서체는 어떤 모습일까.


개성 강한 ‘칠곡할매서체 5종’, 다양한 활용

폰트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글꼴마다 가진 특징과 가독성에 있다. 어떤 상황과 목적에 따라서 폰트를 고를 때는 이를 사용하는 목적과 지향점을 찾아야 하는데, 공적인 문서에서 예술성이 강한 글씨 형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게 구체적인 예시 중 하나다.

개인의 글자체를 폰트화하는 것은 가독성보다는 글씨가 가진 개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글씨의 성격에 따라서 이는 여러 분야에 적용되어 사용되며 세상에는 다양한 목적에 따라 그에 필요한 글꼴이 존재하고, 세상의 모든 글자가 가독성이 높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칠곡할매서체는 개인의 글자체를 폰트화 한 것으로 사실 가독성이 높은 글자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칠곡할매서체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안정적으로 높은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할머니들의 손 글씨체가 활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 한컴오피스 프로그램에서도 이 칠곡할매서체를 만나볼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 한국문화정보원의 ‘공공 안심 글꼴’ 사업을 통해서 2021년 한컴오피스에 정식 탑재되었으며 한글 2018 이상의 버전에서는 별도의 설치를 할 필요 없이 본 서체를 사용 가능하다. 언뜻 할머니들의 삐뚤삐뚤한 글씨가 문서 편집 프로그램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할머니들의 글씨가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한컴오피스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칠곡할매서체 5종. 한컴오피스캡쳐
칠곡할매서체의 주인공은 김영분(74), 권안자(76), 이원순(83), 추유을(86), 이종희(87) 할머니다.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한글을 배우신 어르신들이시며, 이 폰트를 제작하기 위해서 준비 기간 동안 4개월을 내리 한 사람당 2천 장의 종이에 서체를 연습하셨다고 전한다. 건장한 성인도 긴 시간 글씨를 쓰면 피로도를 느낄 수 있지만 할머니들은 늦게나마 깨우친 한글에 마음을 담아 새로운 도전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권안자 할머니. 한 번 연습할 때 마다 열 장 씩 글씨를 쓰셨다고 한다 /칠곡군
이종희 할머니. 7자루의 볼펜에 할머니의 노력이 담겨 있다 /칠곡군
문해학교는 한국전쟁 이후 또는 각자의 사정으로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교육의 기회를 어르신들께 제공하는 사업이다. 칠곡할매서체는 이 성인문해교실 참가 할머니들에 의해서 탄생하게 됐으며 비록 완전한 가독성과 실용성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칠곡할매서체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서체의 고향과도 같은 칠곡군에서다. 칠곡군에서는 할매들의 글씨체를 적용한 다양한 현수막을 만나볼 수 있다. 지역의 서체를 알리기 위해 가장 노력을 쏟는 이들은 지역민들과 해당 군의 공무원이다. 칠곡의 음식점을 운영하는 한 소상공인은 고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메모에 이 칠곡할매서체를 적용했으며 배달하기 전 음식을 담은 상자에 본 메시지를 꼭 붙인다고 한다. 실제 이 서비스를 시행한 이후부터 매출도 증가했음을 전했다. 지역 소상공인들을 중심으로 할매 글꼴을 서비스에 적용한 사례를 꽤 찾아볼 수 있는데 한 분식집은 이 서체로 제작한 비닐봉투로 음식을 배달하고 있다고 한다.
칠곡할매글꼴을 활용해 제작한 현수막사진 /칠곡군
칠곡할매글꼴로 작성한 감사의 글을 배달 상자에 붙인 신혜경씨 /칠곡군
또한 백선기 칠곡군수의 명함 역시 다른 이들의 명함과는 차이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명함에 들어가는 글씨는 가독성 면에서 우수한 글꼴을 선택하기 마련이지만 백 군수의 명함은 다르다. 그는 칠곡할매서체 5종으로 제작한 다섯 가지의 명함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어찌 보면 일반적으로 쓰이는 다른 정자체의 명함에 비해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다. 이외에도 칠곡군의 공직자들 역시 해당 글꼴을 적용한 명함을 사용하며 지역 서체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과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칠곡할매글꼴 5종을 활용해 명함을 제작한 백선기 칠곡군수 /칠곡군
칠곡할매서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현재 지역을 넘어서 전국구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역사학자 정재환 성균관대 교수가 홍보 대사로 활동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서체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할매 글꼴의 활용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사례는 경주 황리단길 입구에 있는 경주공고의 외벽 광고판이다. 경주공고는 지난 3월 칠곡할매서체 5종 중 권안자체를 적용한 ‘지금 너의 모습을 가장 좋아해’라는 글판을 제작해 학교 외벽에 설치했다. 이는 황리단길을 찾는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사진 촬영 명소로도 주목받았다.

경주공고와 칠곡군 할매글꼴의 만남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황리단길의 특성상 평소에도 관광객들이 붐비며 경주공고는 이에 학교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형 현수막을 설치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단순한 홍보에서 그치기보다는 희망을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는 교장의 제안에 따라 대형 글판을 만들게 되었고, 여러 가지 글꼴을 적용할 수 있었으나 아날로그 감성까지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본 칠곡할매서체를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흔히 홍보를 위한 현수막이나 대형 글판은 눈에 잘 띄는 정자체를 활용하는 사례가 대다수다. 하지만 경주공고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청소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던 과정 중 할머니들의 마음이 담겨 따뜻함이 느껴지는 본 서체가 글판의 취지와 가장 일치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신 어르신들의 학구열과 노력, 열정이 그대로 담긴 폰트 사용은 많은 이들과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비록 할매글꼴은 목적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정자체와는 다른 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 존재만으로도 훌륭한 우리의 유산이며 다양한 활용성에 대해 앞으로도 더 기대를 모으게 한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 칠곡할매서체

칠곡할매서체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유난히 더 높은 것은 우리네 정겨운 할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특히 굴곡진 한국 역사 속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어르신들의 세월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한 메시지는 칠곡할매서체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월 칠곡군에 따르면 칠곡 할머니 글꼴이 국내 최초의 한글 전용 박물관에 전시된다고 한다. 충주시 우리한글박물관은 지난 1월 5일부터 칠곡할머니 글꼴로 제작한 표구를 상설 전시하고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에게 공개했다.
우리한글박물관 김상석(사진 우) 관장과 정승각 그림책 작가(사진 좌)가 칠곡할머니 서체로 제작한 표구를 들고 있다 /칠곡군
또한 칠곡 할머니 글꼴에 담긴 숨은 이야기와 제작 과정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안내 책자를 비치하고 별도의 기획적 역시 가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본 폰트는 한글 글꼴 5종(칠곡할매 김영분체, 칠곡할매 권안자체, 칠곡할매 이원순체, 칠곡할매 이종희체, 칠곡할매 추유을체)으로 되어 있으며 할머니들의 이름을 붙여 폰트의 이름을 만들었다. 본 폰트는 영어 서체로도 제작됐다.

김상석(60) 우리한글박물관장은 “칠곡할머니 글꼴은 해방이후 할머니들의 굴곡진 인생은 물론 성인문해교육 성과와 한글의 역사가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앞으로 박물관 관람객과 한글학회를 대상으로 칠곡 할머니 글꼴 홍보와 보급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할머니들의 글씨체가 폰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다음 사례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칠곡할매글꼴로 제작한 표구와 글꼴이 담긴 USB를 유물로 지정하고 이를 영구보전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심동섭 국립한글박물관장은 “칠곡할매글꼴은 정규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마지막 세대가 남긴 문화유산으로 한글이 걸어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새 역사를 쓴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 할머니들의 글씨를 접하면 정자체가 아닌 개성이 드러나는 개인의 글씨라는 점에서 실용적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할머니들의 글씨는 다양한 판로를 통해서 활용되고 있으며 그 역사적 가치로서도 훌륭한 우리의 문화유산임을 깨닫게 한다. 사람의 글씨에는 그의 삶과 마음,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 할머니들의 글씨체 역시 개인의 삶 속에서 시대의 애환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추유을 할머니. 그냥 쓴 글씨가 더 아름답다 /칠곡군
김영분 할머니. 개성이 느껴지는 할머니의 글씨체 /칠곡군
이원순 할머니. 칠곡할매서체에는 할머니들의 열정이 담겨 있다 /칠곡군
현재 칠곡군 홈페이지에서는 칠곡할매서체를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며 개인 및 기업 사용자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다만 칠곡할매서체의 지식재산권은 칠곡군에 있으며 이 폰트는 유료로 양도하거나 판매할 수 없고 원본 글씨 형태의 변형 없이 사용해야 한다. 또한 각종 인쇄물 등 출판용 서책이나 웹사이트 적용 시 저작권자를 밝히고 사용 가능한 곳은 저작권을 밝히고 사용하길 안내하고 있다.


영화로도 제작된 칠곡 할매들의 한글 공부 이야기

2019년 2월 개봉한 김재환 감독의 영화 ‘칠곡가시나들’(2019)은 문해학교 현장의 모습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이다. 영화에서는 나이 듦을 환영하는 웰컴투에이징 할머니들의 일상을 담고 있으며 뒤늦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더 열정과 재미를 느끼고, 한글을 통해 소소한 삶의 행복을 이루는 어르신들의 삶을 조명했다.
영화 '칠곡가시나들' 포스터 /단유필름
영화 속 할머니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향의 푸근한 인상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글 공부를 시작한 설렘과 기쁨을 가진 소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2019년 1월 공개된 12종의 보도스틸에서도 할머니들의 수줍은 미소와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칠곡할매들의 한글 공부기와 행복한 욜로 라이프를 담은 이 영화는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개봉에서는 불공정한 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영화 개봉 전에 칠곡가시나들을 촬영한 김재환 감독은 본 영화의 CGV 상영을 전격 거부했는데, 이어서 하루 뒤 메가박스극장 상영 또한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추가로 밝혔다.

구체적인 상영 거부 이유는 저예산 영화에 대한 스크린 수 배정 차별에 의한 문제가 거론됐다. 대중의 선호도에 따라 저예산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스크린 배정이 전폭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관례적인 부분도 문제점이었으나, 같은 시기에 개봉한 비슷한 규모의 타 영화에는 비교적 많은 스크린이 부여됐다는 점에서 의아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영화 칠곡가시나들은 4.2만 명이라는 관객 수를 기록했다. 비록 단편적인 숫자로만 판단해 볼 때 그다지 높은 수치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대형 멀티플렉스의 상영 보이콧 속에서도 이뤄낸 성과임을 생각하면 고즈넉하면서도 웃음이 넘치는 할매들의 소소한 일상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한글 공부에 대한 학구열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생각보다 높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칠곡가시나들' 공개 스틸 /단유필름
영화 '칠곡가시나들' 공개 스틸 /단유필름
보도스틸을 통해 공개된 할매들의 모습은 특히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포스터에는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이라는 작은 타이틀이 눈에 띄는데 실제로 인생 팔십 한글과 만남을 통해 공부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배움의 기쁨을 누리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배움에는 시기가 없고 한계가 없다는 교훈을 느낄 수 있어 더 아름답다.

할머니들은 영화 속에서 난생처음 한글을 배우고 시장을 지나가다 만나는 간판을 읽으며 떨어진 자음을 맞춰보기도 하고 새로운 설렘을 느낀다. 새로운 배움이란 거창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기쁨을 줄 수 있다. 힐링이 필요한 날 할머니들의 웃음 가득한 한글 공부기 여정이 담긴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