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커피를 마시러 간다면?

마시즘
마시즘2021-01-20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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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과거에 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수능시험? 로또복권? 마시즘의 꿈은 그렇게 소박하지 않다. 수능은 다시 본다고 잘 볼 것 같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고, 로또복권이 당첨된 값보다 시간여행비가 더 들 것 같다.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음료출시’를 하겠다고 생각해왔다. 앞으로 유행할 음료들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새치기를 하는 것이다! 돈과 명예! 그리고 음료가 있는 삶!

나는 시간여행을 할 날을 위해 <백투더퓨처>, <닥터후>, <인터스텔라>, <렛츠고 시간탐험대>로 밤늦게 까지 예습복습 시청을 해왔다. 연말 동안 쉬는 내내 내가 영상을 보는 건지, 영상 속에 있는 건지 모호해지다가 잠에 들었다. 그러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니, 이건 알람 소리가 아니라 ‘징소리’인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무 과거로 왔는데요?
(짧게나마 영상으로도 만들어 봤습니다)
눈을 떴다. 우리집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주변은 온통 기와집과 초가집 뿐이다. 며칠 내내 영화만 주구장창 봤더니 꿈에서 이 사달이 났구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실에서는 노량진 신세더라도, 과거에 가면 영의정 좌의정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여기서 토익 본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정신을 깨우는 데는 음료만한 게 없다. 저잣거리에 나가 마실 것을 찾기로 했다. 아침부터 막걸리를 마시는 것은 너무하니까. 문제는 아무리 청량음료를 설명해도 사이다는 곧 식혜요, 콜라는 수정과로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커피나 하나 주세요. 현기증 나니까.”

“커피요?”

아 그렇지. 커피도 있을 리가 없구나. …근데 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건 뭔데요?
너희가
조선의 아메리카노를 아느냐
(사실상 숭늉을 마시던 습관이 아메리카노로 온 게 아닐지)
저잣거리를 가로질러 가는 양반네가 컵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모습을 보아하니 완전 테이크아웃 커피 같은데, 뭘까? 나만 궁금한 게 아니었다. 과거 외교관으로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서긍은 <고려도경>이라는 책에서 고려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음료에 대해 썼다. 고려 사람들은 물그릇을 들고 다니는데 그 안에는 ‘숭늉’이라는 음료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점심을 먹고 아메리카노를 들면서 회사로 향할 때 우리 조상님들은 숭늉을 들고 다녔구나. 마시즘에서도 예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밥을 먹고 마시는 고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숭늉의 대체재라고.”
그 많던 숭늉은
대체 왜 마신 것일까?
(중국이나 일본에 누룽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음료처럼 마시는 것은 한국뿐인듯)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한국이 유독 ‘고소한 차음료’를 좋아하는 것. 이것은 모두 숭늉차가 만든 파급효과다. 숭늉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밥을 짓고 솥에 붙어있는 밥풀을 쉽게 제거하기 위해, 혹은 한 톨의 쌀알조차 완벽하게 먹기 위해서다. 시작이 어찌 되었건 우리 조상, 아니 부모님만 생각해봐도 숭늉은 밥을 먹고 소화까지 생각하는 식사의 마침표 같은 음료였다.
(어른들만 봐도 밥 먹고 숭늉으로 마무리를 해야 식사가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숭늉이 없는 곳에서의 삶은 소화불량의 연속이었다. 숙종 때 청나라에 간 김창업도, 정조 때 북경을 다녀온 서유문도 각각 숭늉이 없는 타국에서 고생을 하다가 숭늉을 겨우 찾아 마시고 속이 편해졌다는 후기(라고 쓰고 기행문이라고 읽는다)를 썼다. 치킨과 맥주, 팝콘과 콜라처럼 떨어지는 걸 상상하기가 어려운 조합이었던 것.
조선시대의 숭늉의 맛
숭늉은 훌륭한 로스팅 음료다?
감동이 길어 설명이 길었다. 생각해보니까 만들기가 어려워서 마시지 않았을 뿐 막상 고기집이나 식당에서 숭늉이 후식으로 나오면 감탄하며 즐겁게 마신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마시즘도 얼른 주막 한 곳에 들어가 줄을 선다. 다행히 숭늉은 만드는 법이 어렵지 않고, 비싼 음료가 아니어서 쉽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선시대 숭늉의 맛은 어떨까? 무쇠 솥에 남아있는 밥풀은 뜨거운 온도에 로스팅이 되어 구수한 향을 풍기고, 거기에 물을 붓자 자연스럽게 녹말이 나오면서 단맛이 생긴다. 거기에 후루룩 딸려 들어오는 밥 알맹이까지. 아니, 이건 1000년 뒤에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료의 원형이잖아!
시간여행자 마시즘
숭늉계의 스타벅스를 만들겠다
(숭늉만 파는 주막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따끈하고 구수한 조선의 아메리카노, 숭늉을 한 사발 마시면서 생각했다. 저잣거리에 있는 숭늉 집들은 다 후식으로만 이걸 내놓으니까, 우린 숭늉만 파는 상가를 만드는 거다. 멋진 한옥 인테리어에 간판을 달고, 다른 집 숭늉과 다르게 우린 흑미를 써서 까만 숭늉을 만드는 거야! 고소한 풍미가 더 돋보일 테지! 가게 이름은 뭘로 할까? 스타벅스나 엔제리너스를 한자로 어떻게 쓰더라?

같은 숭늉이라고 해도 쌀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밥솥에 태우기, 물의 비중에 따라 맛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여름 <음료학교> 때 숭늉을 만들겠다고 한 팀은 지역마다 숭늉 만드는 법과 맛을 모두 조사했거든!

곧 주인장이 와서 숭늉(을 비롯한 밥)값을 받으러 왔다.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다행히 만 원짜리가 있다. 조선 물가가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겠어? 하는 순간 주인장의 얼굴이 만 원 빛처럼 초록색으로 변했다.
(시간여행을 하더라도 가슴 속에 지폐 한 장은…)
“아… 아니 용상을 주머니에서… 여, 역모다!!”
숭늉의 시대는 다시 올까요?
잠자기 전에 환전을 미리 해놨어야 하는데… 감히 임금의 그림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는 죄로 의금부에 끌려간다. 아, 익숙한 이 풍경. 지난 <음료덕후 마시즘은 사약을 받으라!>에서 썼던 그 상황이구나… 따뜻한 숭늉 한 잔 마시려다가 다시 뜨거운 사약 맛을 보게 되다니…
(가마솥이 밥통으로…)
나는 눈물을 흘리며 사약을 들이킨다.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면서 주마등처럼 미래의 일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 땅에 커피가 들어와서 후식을 대체하는 모습. 1980년대 전기밥솥이 들어와 90년대에 보급률이 94%까지 올라가는 모습. 그렇구나, 쿠쿠. 네 녀석이 숭늉의 미래를!!
(2021년의 느낌으로 태어난 숭늉차, 까늉)
눈을 떴다. 다행히도 한복 핏이 아니라 잠옷을 입고 있다. 휴대폰을 켜보니 음료학교에 참가한 대학생 친구들로부터 온 연락이 와 있었다. 자신들이 낸 까만숭늉차 ‘까늉’의 크라우드 펀딩이 300%를 넘었다고. 마시즘님도 참여했냐고.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미래를 알고 과거로 가는 것보다 과거를 알고 미래를 만드는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조선의 아메리카노, 까만숭늉차 까늉. 숭늉의 시대는 다시 한 번 올 수 있을까?

참고문헌
- 윤덕노의 음식이야기 <숭늉>, 윤덕노, 동아일보, 2011.02.25
- 영양학자 김갑영의 우리 음식 이야기-누룽지와 숭늉, 김갑영, 문화일보, 2013.12.11
- 숭늉도 테이크아웃이 되나요? 김경빈, 오피니언타임스, 2019.02.21
- 2010 농촌 신풍속도 숭늉 대신 커피, 이승환, 농민신문, 2010.8.25


*이 글은 음료학교 까늉 유료 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번외 : 숭늉 한 잔 마셨습니다
(미안하지만 지난해, 올해 지인 선물은 다 이거였다)
지난해 여름, 음료덕후들을 모아 제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본 <음료학교>의 첫 출시작인 ‘까늉’의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습니다. 대학생인 친구들이 ‘숭늉’이라는 옛 음료를 가져온 것도 신선했지만, 맛은 다르지만 숭늉과 커피가 한국 사람의 일상에 차지했던 부분이 비슷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숭늉, 숭늉 말만 많이 들어봤지, 태어나서 이렇게 숭늉을 많이 마셔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까늉은 보다 음료에 가깝게 가볍고 깔끔한 느낌으로 입가심을 하되, 향은 더욱 고소하게 살리는 방향으로 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음료를 만들 때도 많은 분들의 노력과 시간, 영혼을 넣어야(?)함을 느꼈다랄까요.

지원 단계부터 제품의 펀딩과 출시까지 마시즘이 함께 해온 음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커피를 줄여야 하는 분들을 위한 좋은 차라고 생각했지만, 제 예상보다 맛이 더 좋게 나왔다는 게 함정이자 장점이랄까요. 국내 최초로 소비자가 만들고, 마시즘이 함께한 음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