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모인 단체채팅방에 ‘나 오늘 야근해’라고 말해보자. 세상에나 힘들겠다, 얼른 끝내고 들어가 정도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라는 하소연 한 마디가 추가되는 순간 채팅방이 뒤집어진다. ‘식사는 했냐’는 말이 안부 인사로 쓰이고 ‘다음에 밥 한 번 먹자’가 작별 인사와 동의어인 대한민국에서 밥, 특히 밥 먹는 시간은 거의 신성불가침영역이나 다름없으니까.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나라 대한민국의 회사원 답게 점심시간만큼은 모든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법. 가끔은 점심시간에 일 이야기를 해야 할 수도 있고 구내식당 의자 착석-회사 로비에 있는 카페 의자 착석-사무실 의자 착석이라는 하체부종 촉진 코스를 밟게 되는 날도 있다.
이런 일상 속에서 점심시간 한 시간을 완전히 나만을 위해 써 보기로 했다. 간단한 도시락 하나 들고 회사 주변 괜찮은 산책코스를 발굴해 보는 거다. 매일은 좀 그렇고, 가끔 한 번씩.
이런 일상 속에서 점심시간 한 시간을 완전히 나만을 위해 써 보기로 했다. 간단한 도시락 하나 들고 회사 주변 괜찮은 산책코스를 발굴해 보는 거다. 매일은 좀 그렇고, 가끔 한 번씩.
<1> 샌드위치 들고 약현성당으로
점심시간 회사와 거리두기 시리즈, 그 첫 번째 목적지는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정했다. 충정로 29번지인 회사 건물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히 가는 곳이다. 회사 옆 샌드위치 집에서 닭고기 들어간 샌드위치를 사고 편의점에서 바나나맛 우유를 산 다음 느긋하게 출발했다.
약현성당 가는 길에는 성당과 이웃한 ‘성 요셉 아파트’가 있는데, 흔히 생각하는 요즘 아파트 모양이 아니다. 일자로 길게 쭉 이어진 아파트 건물 1층에는 카페, 세탁소, 식당 등 친근한 가게들이 들어섰다. 청년 소상공인들이 운영하는 것 같은 세련된 가게들도 있다. 이 아파트 1층 카페인 ‘커피방앗간’에는 점심시간마다 인근 직장인들이 밀물처럼 우르르 밀려든다. 방앗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고소한 커피를 파는 맛집이다.
약현성당 가는 길에는 성당과 이웃한 ‘성 요셉 아파트’가 있는데, 흔히 생각하는 요즘 아파트 모양이 아니다. 일자로 길게 쭉 이어진 아파트 건물 1층에는 카페, 세탁소, 식당 등 친근한 가게들이 들어섰다. 청년 소상공인들이 운영하는 것 같은 세련된 가게들도 있다. 이 아파트 1층 카페인 ‘커피방앗간’에는 점심시간마다 인근 직장인들이 밀물처럼 우르르 밀려든다. 방앗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고소한 커피를 파는 맛집이다.
성요셉 아파트는 1971년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서울시가 미래에 물려줄 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하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 미래유산 아파트 4곳 중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제외한 3곳(성요셉아파트, 충정아파트, 동대문아파트)가 모두 회사 근처에 있다. 회사건물 바로 건너편 충정아파트는 무려 1932년에 지어진 한국 최초 아파트로, 준공 당시에는 유명인과 부자들이 살던 핫플레이스였다고. 고풍스러운 성요셉 아파트도 현대적 건물들과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면서 제자리에 잘 서 있다.
천천히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면 탁 트인 큰 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을 하면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이라는 팻말이 붙은 출입구가 나온다. 여기가 약현성당 들어가는 길 중 하나이다(정문은 따로 있음).
천천히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면 탁 트인 큰 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을 하면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이라는 팻말이 붙은 출입구가 나온다. 여기가 약현성당 들어가는 길 중 하나이다(정문은 따로 있음).
[나 여기 알아, 열혈사제에 나온 성당이야]
조금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면 큰 나무와 담쟁이덩굴이 반겨준다. 벚꽃 피는 철에는 약현성당 명물인 겹벛꽃이 팔랑팔랑 떨어지며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풍경을 선사하기도 한다.
성당 마당에 들어가면 이미 먼저 온 직장인들이 커피 하나씩 들고 성당 건물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다. 어떻게든 하체부종에서 벗어나 보려는 눈물겨운 의식 같기도.
그늘과 야외 탁자까지 갖춰진 쉼터는 이미 만석이다. 원래 쉼터에 편하게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졌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대충 어디라도 앉으면 되니까.
조금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면 큰 나무와 담쟁이덩굴이 반겨준다. 벚꽃 피는 철에는 약현성당 명물인 겹벛꽃이 팔랑팔랑 떨어지며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풍경을 선사하기도 한다.
성당 마당에 들어가면 이미 먼저 온 직장인들이 커피 하나씩 들고 성당 건물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다. 어떻게든 하체부종에서 벗어나 보려는 눈물겨운 의식 같기도.
그늘과 야외 탁자까지 갖춰진 쉼터는 이미 만석이다. 원래 쉼터에 편하게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졌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대충 어디라도 앉으면 되니까.
약현성당에는 인근 주민들을 위해 조성된 짤막한 산책코스가 있다. 중간중간 예수님의 행적을 묘사한 돌이 배치돼 있어, 천주교 신자라면 찬찬히 걸으며 묵상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걷기 좋은 길이다. 계단식으로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오솔길에는 나무와 관목이 빼곡하다. 저번에 왔을 때는 여기까지 내려오지 않았기에 기대를 품고 들어가 본다.
오솔길 한쪽에 웬 계단이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다. 이런 비밀스러워 보이는 공간을 보면 은근슬쩍 가슴이 뛰는 ‘어른이’로서 올라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구조였다.
슬쩍 올라가니 작은 벤치와 ‘약현성당 전망대’라는 안내판이 있다. 전망대 자체는 야트막하지만 약현성당 지대 자체가 높은 편이라 도시 풍경 보는 재미가 있다. 탁 트인 도로 저편에 숭례문이 보인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 전망을 감상했다.
야무지게 점심밥을 먹고, 쓰레기는 봉투에 잘 갈무리해 묶은 다음 한 손에 들었다. 오솔길을 왔다갔다 하다 보니 ‘약현성당 기도 동산’이라는 조그만 공터가 나온다. 커다란 십자가와 옛 천주교 신자들의 고행을 묘사한 것 같은 부조가 엄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옆에는 일렬로 벤치가 있다. 사람도 두어 명 앉아 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기도 동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용히 사색에 잠기는 분위기다.
슬쩍 올라가니 작은 벤치와 ‘약현성당 전망대’라는 안내판이 있다. 전망대 자체는 야트막하지만 약현성당 지대 자체가 높은 편이라 도시 풍경 보는 재미가 있다. 탁 트인 도로 저편에 숭례문이 보인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 전망을 감상했다.
야무지게 점심밥을 먹고, 쓰레기는 봉투에 잘 갈무리해 묶은 다음 한 손에 들었다. 오솔길을 왔다갔다 하다 보니 ‘약현성당 기도 동산’이라는 조그만 공터가 나온다. 커다란 십자가와 옛 천주교 신자들의 고행을 묘사한 것 같은 부조가 엄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옆에는 일렬로 벤치가 있다. 사람도 두어 명 앉아 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기도 동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용히 사색에 잠기는 분위기다.
갓 쓴 선비 석상이 눈길을 끈다. 석상 밑에는 ‘성 정하상 바오로’ 라고 새겨져 있다. 한국 천주교 역사를 생각하면 이 분도 분명 사연이 엄청나신 분일 텐데, 누구일까. 벤치에 앉아 검색을 좀 해 보니 이 선비가 누구인지 바로 나왔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정약용의 형 정약종의 아들로, 일곱 살에 아버지와 큰형이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에게 의지해 성장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 기반을 다지는 데 평생을 바치고 45세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약현성당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터에 세워진 것이었다.
위대한 사람이 시대를 바꾸는 것일까, 아니면 시대가 위대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일까? 유서 깊은 성당에 와서 그런지 생각이 많아진다.
오솔길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보니 12시 45분. 슬슬 회사로 복귀할 시간이다. 성당 정문쪽으로 나가다 보니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운다. 회사 선배 두 명이다. 선배들은 테이크아웃한 밀크티 컵을 하나씩 들고 화단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성당 본당 건물을 빙글빙글 도는 직장인들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 앉아 있으면 봤던 사람이 계속 지나가. 탑돌이 하는 줄.”
혼자서 뭐 하냐는 말에 이러저러한 취지로 산책 중이라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좋은 산책 코스가 더 있다고 추천까지 받았다. 큰 소득이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정약용의 형 정약종의 아들로, 일곱 살에 아버지와 큰형이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에게 의지해 성장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 기반을 다지는 데 평생을 바치고 45세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약현성당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터에 세워진 것이었다.
위대한 사람이 시대를 바꾸는 것일까, 아니면 시대가 위대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일까? 유서 깊은 성당에 와서 그런지 생각이 많아진다.
오솔길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보니 12시 45분. 슬슬 회사로 복귀할 시간이다. 성당 정문쪽으로 나가다 보니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운다. 회사 선배 두 명이다. 선배들은 테이크아웃한 밀크티 컵을 하나씩 들고 화단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성당 본당 건물을 빙글빙글 도는 직장인들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 앉아 있으면 봤던 사람이 계속 지나가. 탑돌이 하는 줄.”
혼자서 뭐 하냐는 말에 이러저러한 취지로 산책 중이라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좋은 산책 코스가 더 있다고 추천까지 받았다. 큰 소득이다.
셋이서 성당 정문을 지나 회사로 돌아간다. 성당 바로 옆 가정집 담벼락에 핀 분홍색 장미가 시선을 끌고, 눈앞에는 한옥지붕을 그대로 살린 작은 가게가 있다. 선배들이 마시던 밀크티를 파는 집이다. 한옥 지붕에 ‘아크바’라는 이국적 이름이 인상적인 이 가게는 낮에는 차를 팔고 밤에는 맥주와 치킨을 판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중림동과 썩 어울리는 느낌이다.
성당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을 따라 올라가니 가톨릭출판사 건물이 보인다. 직선 반듯한 현대식 빌딩이다. 약현성당과 붙어있는 이 출판사는 1880년 ‘조선성서출판소’로 시작했는데, 포교에 쓸 서적을 찍어내려 세워졌지만 갈수록 일제에 대항하는 활동에도 일조했다고 한다. 회사 근처에 140년 된 출판사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성당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을 따라 올라가니 가톨릭출판사 건물이 보인다. 직선 반듯한 현대식 빌딩이다. 약현성당과 붙어있는 이 출판사는 1880년 ‘조선성서출판소’로 시작했는데, 포교에 쓸 서적을 찍어내려 세워졌지만 갈수록 일제에 대항하는 활동에도 일조했다고 한다. 회사 근처에 140년 된 출판사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쭉 걸어 2호선 충정로역에 가까워질 무렵, 길가에 앉아 햇빛 쬐는 길고양이를 만났다. 신축 건물과 재개발 대상 건물들이 서로 어깨를 마주댄 동네 풍경과 얼룩덜룩한 고양이의 자태가 묘하게 어울린다. 이 통통한 녀석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지, 휴대폰을 들이대도 숫제 눈까지 지그시 감고 ‘광합성’에 푹 빠져 있다. 뭔가 작고 네모난 것을 들이대며 괴상한 소리(아~ 귀여워!)를 내는 인간은 해롭지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걸까.
길고양이와의 만남으로 한 시간 동안의 산책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햇빛을 봐서 그런지 괜히 생기도 도는 것 같고 마음도 너그러워진 기분이었다. 역시 사람은 적당히 몸을 움직여야 잡생각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실감한다.
온전히 내 페이스에 맞춰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는 한 시간. 다음 산책은 어디로 갈까.
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길고양이와의 만남으로 한 시간 동안의 산책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햇빛을 봐서 그런지 괜히 생기도 도는 것 같고 마음도 너그러워진 기분이었다. 역시 사람은 적당히 몸을 움직여야 잡생각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실감한다.
온전히 내 페이스에 맞춰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는 한 시간. 다음 산책은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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