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코코샤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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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STREET2020-05-13 08: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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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이 오는 5월 14일 주요 핸드백 가격을 7~17% 인상한다는 소식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오픈 런(Open run·재고가 적은 명품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개점과 동시에 뛰어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소셜미디어에 ‘오픈런’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샤넬 가방을 어렵게 구매했다는 후기가 나온다. 백화점이 개장하자마자 샤넬 매장으로 달려가 번호표를 받고 가방을 구매했다는 이야기이다. 수십 명 고객이 달려가다 뒤엉키는 해프닝까지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전에도 원하는 샤넬 가방을 구매하기 위해서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일은 많았다. 600만 원이 넘는 클래식, 보이샤넬 라인에 ‘예물백’이라는 별명이 붙는 등 샤넬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샤넬은 ‘명품 중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제품 퀄리티는 당연히 좋아야 할 테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브랜드에는 어떤 뒷이야기가 있을까. 궁금해 찾아봤다.
가브리엘 샤넬 그리고 ‘COCO CHANEL’
샤넬 창시자 가브리엘 샤넬은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 의해 수도원에 보내졌다. 그의 수도원 생활은 샤넬 디자인에 깊게 녹아있다. 수도원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영감받아 샤넬의 ‘C’ 로고가 탄생했으며, 수녀복 색인 블랙이 샤넬 메인 컬러가 됐다. 바느질 또한 수도원에서 배웠다.

수도원을 나온 그는 봉제공장에 취직했으며, 저녁에는 캬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했다.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 제목에 ‘코코’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그에게 ‘코코’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시에 그는 이 별명을 싫어했지만 훗날 브랜딩에 활용했다. 

샤넬은 부유한 남자들을 사귀며 투자를 받아 패션사업을 시작했다. 1909년 모자 사업으로 본격 디자인 활동을 펼쳤다. 당시 꽃, 리본 등 화려한 장식이 인기였는데 디자인이 화려할수록 모자가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녀는 모자 디자인을 심플하게 바꿨다. 당시 유명 연극배우가 샤넬의 모자를 쓰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후 의상까지 영역을 넓힌 그는 ‘탈코르셋’을 주도했다. 여성 의상에서 코르셋을 없애는 등 실용성에 초점을 맞췄다. 남성복의 전유물이던 섬유 ‘저지’로 편한 여성복을 만들었고, 무릎 위까지 오는 스커트를 디자인해 활동성을 높였다. 또 군복에서 영감을 얻어 자켓을 만들었는데, 여성 외투에 주머니를 만드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각에서는 가브리엘 샤넬의 디자인에 대해 ‘푸어 룩(Poor Look)’이라고 비난했는데 그녀는 편하지 않은 건 럭셔리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퀼팅 패턴의 숄더백을 디자인한 것도 당시 혁명이었다. 당시 여인들은 손잡이가 없는 클러치나 짧은 손잡이가 있는 가방을 주로 들고 다녔는데, 가방에 체인을 달아 실용성을 더했다. 여성들에게 ‘양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샤넬은 성공과 자유를 갈망했다. 그는 화려함 대신 실용주의와 심플함을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가 디자인한 퀼팅백, 투톤슈즈, 트위드 수트 등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갈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일생에 남긴 명언들은 코코샤넬의 가치를 되새기게 만든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또다시 되새겨 본다.

-가브리엘 샤넬 명언 일부-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진정한 우아함의 핵심은 심플함이다,”
“아름다움이란 당신이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할 때부터 시작된다,”
“럭셔리의 반대는 빈곤함이 아니다. 천박함이다.”
“못생긴 여자는 없다. 게으를 뿐이다.”
“20대의 얼굴은 자연이 준 거지만, 50대 얼굴은 당신의 공적이다.”

김가영 기자 kimga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