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을 넘는 와인을 찾아서, 포트와인의 모든 것

마시즘
마시즘2020-03-13 11:04:35
공유하기 닫기
와인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이
와인을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아는) 한국에서 가장 감동적인 와인 이야기는. 군대 공관병의 이야기다. 사단장님이 사놓은 포도 20박스로 와인을 만들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나름 포도를 으깨고 숙성을 시켰는데 막상 시음 때가 다가와서 마셔보니 독약이 더 달콤하겠다는 이야기다. 급하게 웰치주스를 구해서 넣었더니 이번에는 포도주스가 되었다고.

사단장님은 기대에 가득 차 사람들을 모아 오고 있다고 하고. 공관병은 특단의 조치를 한다. ‘소주를 타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소주 맛이 나서 문제. 와인을 사러 갈 시간은 없고, 부대를 털어 맛스타 포도를 다 넣었더니 얼추 포도주 맛이 나서 병에 담아 그 날 행사를 만족스럽게 마쳤다는 이야기다.
(디오니소스도 울고 갈… 맛스타와인)
그렇다. 와인을 만드는데 중요한 것은 재료도 기술도 아닌 ‘목마름’이었다(아니다). 으레 하는 군대 허세일 지도 모르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일이 영국에서도 일어났었다. 오늘 마시즘은 와인이 너무 고파서 와인에 소주… 아니 브랜디를 타버린 ‘포트와인’에 대한 이야기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포도밭을 돌려줘
먼 나라 이웃나라로 역사를 배운 마시즘은 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개와 고양이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프랑스인을 싫어하는 영국인도 프랑스의 하나는 좋아했다. 바로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나는 와인이었다. 하지만 ‘백년전쟁(1337년~1453년)’ 이후 영국은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보르도 지역을 프랑스에게 빼앗긴다. 프랑스… 화, 화해하지 않을래?
(아무리 사이 나쁜 친구도 100년을 싸우면 정들텐데)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와인을 내어줄 프랑스가 아니었다. 보르도 지역을 되찾은 프랑스는 교역을 중단하게 된다. 영국 내에서는 와인을 만들 포도가 자라지 않고, 이탈리아까지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영국인들은 보르도를 대체할만한 와인 산지를 찾아 나선다.

17세기, 포르투갈 북부의 항구도시 오포르토(O’porto)를 발견한다. 이곳 도루강 상류에는 품질 좋은 포도가 자라고 있었다. 이 정도면 보르도를 대체할만한 와인을 공급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만든 와인을 런던까지 가져가려면 바다를 타고 2,000KM를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맛 좋은 와인을 가져왔는데
왜 마시지 못하니
와인은 정말 섬세한 술이다. 만드는 과정부터 숙성과 보관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자칫 소음이나 진동, 햇빛, 온도 변화에 노출되면 식초로 흑화 해버리는 개복치 같은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포르투갈에서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했지만 영국으로 가져오는 족족 상해버리자 상인들은 난감했다. 공기의 접촉을 막기 위해 오크통에 촛농 등으로 커버를 만들어도 변질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영국 사람들은 긴 수송기간 동안 상하지 않을 와인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냥 와인 도수를 높여버리면 어떨까?
와인에 브랜디를 타다
포트와인의 탄생
영국 사람들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와인을 발효시키는 도중에 77도짜리 브랜디를 쏟아서 독한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와인은 알콜도수가 상대적으로 낮아 놔두면 계속 발효되어 상하게 되지만, 일정 도수 이상으로 올라간 술은 상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선원들이 독주를 마시는 것도 이와 같다).

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당분을 알콜로! 한창 신나게 와인이 숙성되는 과정에서 브랜디가 들어왔다. 당장 발효를 해줄 효모들이 강한 알콜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미처 알콜로 바꾸지 못한 당분들이 와인 속에 남아 18~20도의 달콤하고 독한 와인이 만들어졌다.
(런던 박물관에 있는 와인성지 오포르투 항구그림)
이렇게 알콜을 주입(?)당한 와인을 ‘주정강화와인’이라고 부른다. 영국 사람들은 이 독특한 풍미의 와인을 한 항구에서 영국으로 가져갔다. 바로 포르투갈의 북부 항구도시 ‘오포르투(Oporto)’다. 그리고 이 와인은 항구의 이름을 따서 ‘포트와인(port wine)’이라고 불리게 된다.
유통기한 때문에 만들어졌지만
맛으로 사랑받다
(교훈은 다음과 같다 애주가들은 술을 못 마시면 답을 찾아내고야 만다, 사진 : Alex Ristea)
약 1670년부터 영국으로 수출된 ‘포트와인’은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기존 와인에 비해 달콤하면서도 브랜디의 풍미까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와인을 안전하게 가져올 수 있어서 좋고, 포르투갈은 새로운 고객이 생겼다. 포트와인으로 대동 단결한 두 국가는 음주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끈끈한 관계를 맺는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와인이지만, 영국의 목마름으로 만들어진 ‘포트와인’. 단지 유통기한 때문에 만들어진 녀석치고는 특유의 풍미로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달콤한 와인만큼이나 이 안에 담긴 영국 사람들의 와인에 대한 목마른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맛스타 포도와 소주로 가짜 와인을 만든 군관병의 심정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