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빼고 아무거나가 대체 뭔데? 회의실 액상차 5

마시즘
마시즘2020-03-10 11:3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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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에서는 지켜야 할 신념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만큼은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은 바로 ‘회의 전에 음료 사 오기’다. 법인카드라는 자유이용권으로 마트의 음료를 아무거나 살 수 있는 기회. 수많은 신입과 인턴이 이 자리를 넘봤지만 나를 뛰어넘은 자는 없었지.

아침 회의. 편집장님이 말한다. “아…” 저 동그란 입모양. 분명 아메리카노다. 그가 매일 아메리카노를 마신 다는 것은 이 사람의 책상에 쌓인 테이크 아웃 커피 탑의 높이만 봐도 알 수 있지.

“아… 나는 커피 빼고 아무거나”

그렇다. 오늘의 음료는 ‘커피 빼고 아무거나’다. 그런데 편집장님, 커피만 빼기에는 세상에 아무거나가 너무나 많은데요.
첫번째
그는 커피를 빼라고 했지만, 커피를 원한다
(구매음료 : 목편각 배도라지차, 돼지감자차, 작두콩차, 블랙보리, 카카오닙스차)
진정하자. 약간의 추리를 하면 편집장님이 어떤 음료를 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업무시간 중 ‘커피 빼고 아무거나’라는 말은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은 음료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커피처럼 업무 내내 입에 달고 마실 수 있는 음료. 바로 보리차, 옥수수수염차 같은 ‘액상차’를 말하는 것이겠지.

또한 그가 뱉은 말. “커피 빼고 아무거나”에는 ‘카페인이 없는 음료지만, 내가 좋아하는 맛은 커피야’라는 무의식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하다. 고소한 차. 한국사람들은 녹차나 홍차보다는 보리차나 둥굴레 같은 고소함을 좋아하니까. 나는 마트에 들어가 고소해보이는 차음료를 5개 사서 마셔보았다. 이 중에 하나를 주면 된다는 것이지?

커피와 가장 풍미가 비슷했던 것은 코코아가 떠오르는 ‘카카오닙스차’다. 이어 ‘블랙보리’는 볶은 풍미를, ‘작두콩차’는 적당한 고소함을 내줬다. 하지만 ‘돼지감자차’는 고소함보다 구수했다. 그리고 ‘목편각 배도라지차’는 고소하다기보다 화한 느낌이 가득하다. 쌍화차의 물 버전이라고 생각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생강향 속에 민트를 숨겨놨다. 이런 트로이목마 같은 녀석!
두번째
책상 위에 두기에 멋이 있는가?
(오피스 음료는 일종의 멋과 같다랄까?)
사람들은 음료에 대한 호감을 어디에서 얻을까. 바로 디자인이다. 음료에는 혹독한 외모지상주의가 펼쳐져 있다. 특히나 여러 사람들이 함께 오가는 학교나 직장에서는 내가 마시고 있는 이 음료가 멋져 보여야 한다. 2019년형 맥북 프로에 아이패드 프로 12.9인치, 그것 모자라서 아이폰 인덕션에 에어팟 프로까지 장비하고 있는 편집장님이라면 더더욱 세련된 디자인을 좋아할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무리 써봤자 직접 보는 게 제일이다. 과거 궁서체로 크게 이름만 박아놓았던 액상차(헛개차, 둥글레차 이런 것) 디자인들은 요즘에 날렵하고 세련되게 페트병이 디자인 되어있다. 다만 ‘돼지감자차’는 아직 투박해서 아쉬웠다. 애플제품이 가득한 책상보다는 좀 더 야생적인 곳에서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세번째
건강함으로 세포를 공략하라
(어린이 방학숙제가 아닙니다, 진지한 음료 프로파일링입니다)
음료와 건강의 상관관계를 유추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검색을 해야 하기 때문).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 각각의 음료는 이것 하나만큼은 괜찮아질 수 있다는 ‘힐링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먼저 만성비염에 시달리는 편집장님에게 필요한 것은 ‘작두콩차’일 것이다. 심한 비염을 달고 사는 사람들은 작두콩차를 입에 달고 산다. 보통 직접 만들거나 우려먹는데 아예 페트병 안에 완제품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작두콩 크기가 사실 콩이 아니라 조약돌만하다는 것을.

‘카카오닙스차’와 ‘돼지감자차’는 각각 다이어트에 좋아 보인다. 칼로리도 없는 녀석이 부지런해서 몸속의 지방을 치워준다고 할까. 단 하나 ‘블랙보리’ 이 녀석은 위험하다. 여기에 들어있는 안토시아닌이 시력을 보호하거나 회복한다고? 안 돼. 편집장님 눈이 좋아지면 나 일하면서 딴짓 못하잖아.
네번째
재료는 역시 신토불이다
(음료 뒷면을 보면 여러 재미있는 재료와 출처를 알 수 있다)
단서를 하나씩 발견할수록 우리는 해답에 가까워지고 있다. 마지막은 바로 신토불이다. 아무리 앱등… 아니 애플을 사랑하는 편집장님이라고 해도. 밥은 국산 쌀밥을 먹고 싶은 법이다. 음료 역시 마찬가지겠지.

보통 이럴 때는 패키지에 ‘100% 국산’ 혹은 ‘국내산’ 등이 큼지막하게 적힌 녀석이 신토불이다. 음료의 여권과도 같은 ‘원재료명’을 살펴봤다. 패키지부터 자신감 뿜뿜이었던 ‘작두콩차’나 ‘목편각 배도라지차’, ‘블랙보리(블랙보리는 아주 조금이지만 맥아가 영국산이군)’정도는 국산의 범주 안에 들었다.

하지만 ‘카카오닙스차’는 아쉽게 되었다. 여기가 페루였다면 신토불이(페루에서 카카오닙스는 신의 열매라고 불린다)였겠지만 여긴 카카오가 아닌 카카오톡의 나라라고.
카페인을 대신할 액상차
편집장님의 취향저격은 바로 이 녀석이야
(여러 요소를 고려해 저는 이 녀석으로 골랐습니다. 수고했다 퇴근이다(아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 액상차라고 하면 단지 보리차나 헛개차만 생각했던 나에게 이 녀석들은 재료부터 외관, 맛과 효능까지 각각의 목적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람의 취향에 맞춰 이렇게 음료를 선물할 수 있겠지.

* 목편각 배도라지차 : 민트초코, 쌍화차를 좋아하는 불나방
* 돼지감자차 : 다이어트를 하지만 구수한 담백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
* 작두콩차 : 코부터 목까지, 꽉 막힌 기관지 교통체증을 겪는 사람
* 블랙보리 : 같은 제품, 음료라도 올블랙을 추구하는 사람
* 카카오닙스차 : 이국적인 고소함을 찾는 사람

결정의 시간이 왔다. ‘커피 빼고 아무거나’에 대한 답을 낼 시간이다. 맛부터 디자인, 효능까지 편집장님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는 음료계의 스나이퍼는 누구일까? 모두 일상 속에서 마시기에 괜찮은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는 바로! 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