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이 별건가요” 책 내는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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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닷컴2020-02-09 11: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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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自敍傳). 작자가 자신의 일생을 소재로 스스로 짓거나 남에게 구술해 쓰게 한 전기입니다. 노년이 되어 쓰는 인생 회고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20대 청춘도 짧다면 짧은 그동안의 삶을 자신만의 색깔로 풀어낸 자서전을 내고 있습니다.
자서전을 낸 20대 대학생들이 14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자신의 책을 들어 보였다. 유년 시절부터 대학생 때까지의 삶을 정리한 자서전, 아르바이트나 봉사활동 등 특정한 경험에 초점을 김인환 김혜인 김수현 서예지 씨, 출판사 ‘이분의일’ 방수영 대표.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파리채 들고 ‘카드캡터 체리’ 흉내내던 시절

‘다섯 살쯤 그 어느 평범한 날…. 그때는 저녁을 먹으면서 내가 푹 빠져 있던 만화 ‘카드캡터 체리’를 봤다. 그러면 나는 밥 먹다 말고 파리채를 들고 벌떡 일어나서 체리가 하는 것들을 흉내 내곤 했다.’

대학생 김혜인 씨(22)가 지난해 10월 펴낸 자서전 ‘아무 날 대잔치’(이분의일)의 일부입니다. 22년 간의 인생이 109쪽 분량에 담겼습니다. 김 씨는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만들 필요가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이 책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썼다”며 “소소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앞으로의 날들을 재미있게 맞이하겠다고 결심할 수만 있다면 자서전을 낸 목표는 충분히 이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9월 개인 자서전 전문 출판사 ‘꿈틀’에서 나온 ‘오늘, Haru’는 ‘하루’라는 필명을 쓰는 20대가 약 20년의 삶을 되돌아본 자서전입니다. ‘어린 시절’ ‘나의 십대’ ‘청춘시대’ ‘전성기’ ‘앞날’로 구성됐다. 여느 자서전과 다른 점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구상, 꿈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풋풋한 삶 전반이 아니라 특정 순간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알바) 7개를 해본 자칭 ‘프로알바러’ 김수현 씨(22·여)가 펴낸 ‘알바 다녀왔습니다’(이분의일)가 대표적입니다. 수제 버거, 피자, 공장, 호프집 등 자신이 거친 알바별로 장(章)을 나눠 근무 기간, 시급 같은 기본 사항에다 알바를 하며 느낀 서러움까지 가감 없이 담았습니다.

김 씨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 세상의 어두운 면을 많이 봤고 힘들었는데 그 순간을 글로 표출하니 마음이 편해졌다”면서 “수십 년이 지나면 혹시 그리워질 수도 있는 지금의 감정을 기록하고 싶기도 했다. 자서전은 나의 20대를 붙잡아 두는 공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서전 출판의뢰 고객층, 노년에서 청년으로”

2016년 문을 연 꿈틀의 박범준 편집장(47)은 그동안 노년층이 주된 고객이었지만 최근에는 20, 30대의 문의가 늘었다고 말했습니다. 제대를 앞둔 군인, 세계 여행을 하다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갖게 됐다는 직장인도 있습니다. 꿈틀은 2018년부터 20대의 자서전 3편을 펴냈습니다. 박 편집장은 “빠르고 짧게 감정을 표출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대세였다면 책을 통해 긴 호흡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려는 아날로그적 취향도 생기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개인 자서전은 판매용이 아니라 소량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져서 제작 비용이 저렴합니다. 출판사에 간단한 편집과 제본만 맡기면 10만 원 안팎입니다. 자서전 출판사 ‘이분의일’ 방수영 대표(29·여)는 “노년층은 직원들이 인터뷰해 대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0대는 직접 원고를 쓰고 표지를 디자인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서모니카 씨가 걸그룹, 온라인 쇼핑몰 등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쓴 ‘저 아직 안 망했는데요’(마음의 숲), 정재윤 씨가 월급쟁이의 삶을 담은 ‘재윤의 삶’(미메시스), 김슬 씨가 자취 경험을 정리한 ‘9평 반의 우주’(북라이프). 각 출판사 제공
2030 에세이집도 유행 중

20대의 자서전은 20, 30대 무명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출간이 늘어나는 현상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이들은 브런치 같은 온라인 텍스트 미디어나 페이스북 등에서 많은 팔로어의 호응을 얻으며 활발하게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사는 작가의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출판사 측에서 먼저 연락해 책을 만듭니다.

유튜버 서모니카 씨가 걸그룹 멤버, 온라인 쇼핑몰 경영 등의 실패담을 엮은 ‘저 아직 안 망했는데요’(마음의숲), 월급쟁이 삶의 단상을 그려 페이스북에 올린 9컷 만화를 모은 정재윤 씨의 ‘재윤의 삶’(미메시스) 등이 이 같은 출판 기획 과정을 거쳤습니다. 오연경 열린책들 기획편집팀 차장은 “SNS에서 인기 높은 작가들은 상당량의 원고를 작성해 놓았기 때문에 출판작업이 빠르게 진행된다”고 말했습니다.

김재희 jetti@donga.com·손택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