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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로제, 할매니얼… 낯선 '맛'들과 친해지는 시간

신동아 2021-06-10 14:20
그 햄버거 가게는 꼭 한 번 가보고 싶던 곳이다. 얼마 전 마침내 후배와 함께 그곳에 들러 각자 버거 세트를 하나씩 주문했다. 결제를 하려는 찰나, 후배가 사이드 메뉴 중 하나를 톡 눌러 추가했다. 바로 그 치즈볼이다.

무심코 베어 먹는 순간 달고 진한 인절미 맛이 훅 풍겼다. 우유향이 더해진 말랑하고 쫀득한 이것은 무엇인가. 씹자마자 입안은 온통 콩가루 범벅이 됐다. 말할 때마다 증기기관차처럼 가루가 뿜어져 나왔다. 웃음이 빵 터지는 맛이었다. 후배는 맛있다고 잘도 먹는데, 나는 한입 베어 먹고 남은 것을 쟁반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맛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굳이 다시는 안 해도 될 경험이었다.
팥을 넣어 만든 달콤한 과자 다쿠아즈. ‘할매니얼’ 열풍을 타고 최근 동서양 식재료를 결합한 디저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게티이미지
할머니+밀레니얼=할매니얼
할매니얼 마니아를 타깃으로 삼은 ‘아침햇살 흑임자콘’. 웅진식품 제공
내가 먹은 치즈볼은 요즘 ‘할매니얼’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통하는 간식이다. 할매니얼은 할머니와 밀레니얼을 합친 말로, 2018년경부터 불어온 ‘뉴트로’ 바람과 연관돼 있다. 뉴트로는 새로움(new)과 복고(retro)의 합성어다.

할매니얼의 범주는 뉴트로보다 훨씬 좁고 뚜렷하다. 할머니 같은 복장(이른바 ‘할미룩’) 또는 할머니 같은 취향을 주로 가리킨다. 맛 분야에서 할매니얼 트렌드의 대표주자는 흑임자, 팥, 콩가루(또는 인절미), 미숫가루, 쑥 등이다. 요즘 슈퍼마켓 아이스크림 코너에 가면 이런 맛을 강조하는 제품이 즐비하다.

흑임자 빵빠레와 흑임자 비비빅의 고소함은 달콤함이 울고 갈 정도로 진하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한 쪽씩 갈라 먹던 쌍쌍바는 인절미맛을 내놓았다. 투게더 역시 흑임자로 새단장했고, 쫄깃한 떡 안에 아이스크림을 채운 찰떡아이스에도 흑임자의 고소함이 더해졌다.

카페에서는 녹차 자리에 쑥을 쑥쑥 넣은 음료가 눈에 띈다. 쑥 특유의 쌉싸래한 맛과 향을 살리면서 진한 초록색도 강조한 것들이다. 장안의 화제 쑥라테는 떨떠름한 맛이 도드라지지만 우유의 고소함, 시럽의 달콤함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부드럽게 느껴진다.

할매 감성은 스낵류에도 깃든다. 이가 깨질 것처럼 딱딱한 옥수수 알갱이 과자가 다시 등장했고, 인절미맛 과자에 크림을 발라 만든 쿠키 샌드도 출시됐다. 작은 제과점에서 직접 만드는 마카롱이나 다쿠아즈(마카롱처럼 달걀흰자가 주재료이나 밀가루와 견과류 등이 들어가 훨씬 폭신하고, 크기도 큰 편인 단 과자)에도 팥, 쑥, 흑임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깨, 콩, 팥, 쑥 등을 생크림, 버터, 크림치즈 등과 섞어 과자나 빵에 맛을 더하기도 한다.
당신은 ‘민초단’인가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민초단’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인터넷 홈페이지 캡처
요즘 핫한 ‘민초’, 즉 ‘민트초코’도 호불호가 확실히 엇갈리는 맛이다. 이 단어를 들으면 나는 뜨거웠던 1997년 여름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볼 계획으로 친구들과 무작정 배낭을 메고 떠났던 해다. 집 떠난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때, 우리는 충청도 바닷가와 내륙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울릉도에 들어가려고 경북 포항으로 향했다.

기세등등한 폭염에 지치고, 돈울 아끼느라 많이 걸어 더 지친 터였다. 짐까지 무거워 몸과 마음도 아주 퀭했다. 게다가 항구 근처에는 마땅한 숙소가 없었다. 작은 상점 안쪽 방을 겨우 얻었는데, 큰 방 하나를 미닫이문으로 막아 만든 방의 반쪽이었다.

짐을 놓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가는 길까지 잃었다. 물어물어 겨우 번화한 곳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마주한 곳이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마침 500원을 더 내면 구매한 아이스크림과 같은 것을 하나 더 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밥 생각은 까맣게 잊고 홀린 듯 ‘쿼터(그 가게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사이즈)’ 두 통을 받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당시 우리의 불안과 허기를 달래준 게 바로 민초맛 아이스크림이다.
느리게 부채질하듯 퍼지는 선선한 맛
최근 민트초코맛 아이스크림(왼쪽에서 두 번째), 마카롱, 쿠키 등이 디저트업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게티이미지
허브의 일종인 민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흔히 아는 페퍼민트, 스피어민트 외에도 애플민트, 진저민트, 오렌지민트 등이 있는데, 하나같이 입안에서 훅하고 퍼지는 상쾌한 맛이 난다. 이것을 매운맛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고추나 후추처럼 열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민트는 느리게 부채질을 하듯 아주 선선한 맛과 향을 느끼게 해준다. 이 독특한 청량함이 달콤함을 만나면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 커피 브랜드에서 몇 달 전 ‘민초라테’를 선보였는데, 인기가 높아 지금도 시중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커피는 뜨거운 물을 부어도 코끝에 시원한 향이 와닿고, 분유 같은 단맛에서 청량함이 감돈다. 뜨거운데 개운하고, 달콤한데 산뜻하다. 야릇하게 맛있고, 비교해 견줄 만한 대상이 없다.

민초가 유행 물살을 타며 요즘 맛있고 재밌는 것이 꽤나 보인다. 민트초콜릿 크림을 듬뿍 넣은 마카롱이 있고, 민트초코에 아몬드와 캐러멜소스를 듬뿍 넣고 섞은 아이스크림도 출시됐다. 빵이나 떡 안에 민트초코 크림을 넣어 파는 가게도 많다. 초콜릿 쿠키에 민트칩을 넣거나, 아몬드 같은 견과류와 한입 크기 과자에 민초의 맛과 향을 입힌 제품도 수두룩하다. 최근엔 다이어트 제품에도 민초 맛이 등장하고 있다.

대체로 씹어 먹는 ‘민초’ 제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민트의 상쾌한 맛이지만, 이것을 제대로 즐기자면 초코의 무심함이 필수다. 초콜릿이 달기보다는 쌉싸래하고, 톡톡 부서지듯 씹히는 식감을 갖고 있어야 민초가 더 맛있다. 초콜릿의 농후하고 무거운 단맛이 부각되면 청량한 민트의 개성이 아무래도 줄어들 수 있어서다.

‘민초’가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1973년 영국에서 민트와 초콜릿을 섞은 디저트가 판매됐다고 하니 거의 반백 년 역사를 가진 맛이다. 게다가 민트와 초코, 캐러멜과 소금, 초콜릿과 고춧가루, 올리브유와 아이스크림 같은 절묘한 조합은 늘 있어왔다.
떡볶이에 진심인 나, ‘로제’의 매력에 사로잡히다
감자튀김과 떡이 로제소스와 어우러진 떡볶이. 삼첩분식 인스타그램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국민 간식’ 떡볶이에도 요즘 독보적으로 개성을 뽐내는 장르가 하나 생겼다. 나 같은 중장년은 물론 MZ세대 입맛까지 사로잡은, 이름도 로맨틱한 ‘로제(rose)떡볶이’다. 로제는 프랑스어로 ‘분홍, 핑크’라는 뜻이다. 떡볶이 외모의 전형은 새빨간 색인데, 로제떡볶이를 보면 분홍색이라기보다는 살구색이나 오렌지색에 가깝다.

로제소스는 파스타에 많이 사용하는 토마토소스에 생크림을 섞어 만든 것이다. 크림과 토마토소스 비율에 따라 새콤한 맛이 강한지, 유지방의 구수하고 부드러운 맛이 강한지가 판가름 난다. 로제소스는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에서 완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것을 고추장 양념 대신 소스로 사용하면 로제떡볶이가 된다. 쉽게 보면 파스타 조리법에서 파스타 대신 떡과 어묵을 넣는 것이다. 조리가 다 된 떡볶이에 치즈 가루를 듬뿍 올리고, 타바스코 등을 흩뿌려 먹는 것을 보면 완성품도 영락없이 파스타와 닮았다. 입맛에 따라 조리할 때 고추장 한 큰술을 넣어 떡볶이 본래의 면모를 조금 살려도 된다.
로제소스+라면스프=헤어날 수 없는 감칠맛
로제소스에는 생크림이 꽤 들어갈 뿐 아니라 베이컨, 소시지 같은 재료도 더해진다. 느끼함에 취약한 사람은 고춧가루나 청양고추 등을 넣어 매운맛을 더하자. 분식 브랜드에서 파는 로제떡볶이 중에는 입안에서 매운맛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화끈함을 자랑하는 것도 있다. 이 떡볶이를 먹고 있노라면 복잡하고 자극적인 미각에 진땀이 빠진다. 그런데 돌아서면 한 번만 더 먹어볼까 하는 기이한 집착이 생기곤 한다.

요즘은 흰색의 크림 떡볶이를 만든 다음 시판 ‘불닭소스’처럼 매운 것을 보태 맛을 내거나, 고추장으로 맵게 완성한 떡볶이에 생크림 또는 우유를 조금 섞어 매콤하게 만드는 변형된 로제떡볶이도 유행이다. 로제소스로 떡볶이를 만든 다음 매운 라면스프를 넣고 골고루 볶아 헤어나올 수 없는 감칠맛을 완성하는 방법도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음식만 남겨야 한다면 떡볶이를 선택할 사람이다. 내 또래 여자에게 떡볶이란 대체로 좋은 기억과 연결돼 있다. 떡볶이 한 접시 앞에서 우리는 어렸고, 친밀했고, 재밌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떡볶이는 혼밥, 야식, 술안주 등에 자주 포함되는 음식이다.

100원 내고 한 접시를 사 먹던 떡볶이는 이제는 1인분에 2만 원까지 할 정도로 종류가 다양해졌다. 떡과 어묵에 대파나 양배추 정도만 들어 있던 옛날 떡볶이가, 튀김·라면·쫄면·당면·삶은 달걀 등을 더해 먹는 즉석떡볶이를 거쳐, 지금은 고기·해물·가공육·치즈·허브·스파이스까지 참으로 다채로운 것을 떡과 함께 볶는 음식으로 변화했다.

떡볶이는 부재료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쫄깃한 떡과 함께 도톰하고 면이 넓은 다양한 당면, 씹는 맛이 차진 분모자(전분을 반죽해 만든 것으로 아주 쫀쫀하다), 불어도 맛있는 오동통한 우동, 간이 잘 배는 건두부 등을 넣으면 더욱 다양한 식감으로 즐길 수 있다.

[이 기사는 신동아 2021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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