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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점심산책] 점심시간에 ‘형무소’ 가는 직장인

29STREET 2021-05-26 15:57
내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 준 분들께 감사하며

가끔씩 사무실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휴식을 갖겠다는 취지로 비정기 기획 ‘직장인의 점심산책’을 시작한 지 1년째. 충정로와 광화문 인근에서 갈 만 한 곳, 스토리가 담긴 곳 위주로 찾아다니다 보니 슬슬 밑천이 떨어져 간다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가까우면서 의미 있는 장소를 찾으려 포털 지도를 켜 놓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독립문’ 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독립문. 사진=네이버 지도 로드뷰 화면 캡처
‘그렇지, 서대문 옆에 독립문이 있었지. 그 근처에 서대문 형무소도… 어라?’

그랬다. 회사에서 가깝고 1시간 알차게 둘러볼 수 있는데다 역사적 의미까지 있는 장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광복 이후 군사정권 시기에는 민주화운동가들을 가두었던 역사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아무리 봐도 점심산책 원래 기획의도인 ‘힐링’과는 어울리지 않지만(오히려 ‘눈물’이나 ‘분노’라는 키워드가 어울릴 것 같다) 어쨌든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1일 오전 11시 50분, 점심도 건너뛰고 독립문행 버스를 탔다.
이렇게 숙연한 점심시간은 처음이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현재(2021년 5월 기준) 방역을 위해 시간당 최대 100명까지만 입장 가능하며 방문일 1일 전까지 온라인으로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사전예약 표가 남았을 경우에만 현장 입장이 가능하다. 평일(5월 21일) 점심시간대라 한산했지만, 만약을 대비해 예약하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3000원으로 사전결제·현장결제 모두 가능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슬비가 내린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역사관 정문을 향해 걸으니 왠지 시작부터 마음이 무겁다. 슬슬 본격적으로 출출해지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식사를 미루고 오길 잘했다 싶다. 독립문 앞에서 내려 쭉 직진하면 되니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정문 옆에 있는 작은 입구로 들어가서 예약을 확인한 뒤 입장권을 받으면 바로 전시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큼지막한 전시관(보안과청사)건물은 지상2층 지하1층으로 지어졌으며 1~2층은 사무실과 회의실, 지하는 조사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상층에는 대한제국 말기 의병 운동, 3.1운동 등 항일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의병장이 아들에게 남긴 편지, 허리에 찼던 칼 등 보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유품들을 쭉 둘러본 뒤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공간 특유의 써늘한 공기가 훅 끼쳐온다.

지하 공간은 일제의 ‘조사실’로 사용된 곳이다. 물고문·손톱 찌르기 고문·상자 고문·인두 고문·폐관 고문 등 잔혹행위에 사용되었던 도구를 비롯해 실제 사람 크기 인형이 당시 상황을 재연하듯 배치돼 오싹함을 더한다. 방문객이 적은 평일 점심시간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동선이 거의 겹치지 않았는데, 지하에 혼자 남아 있으려니 괜히 으스스했다. 고문 흔적을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겁이 나고 소름이 돋는데 100년 전 실제로 이곳에 잡혀온 분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전시관을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린다. 보슬비 맞은 잔디밭에서 푸릇한 흙내가 피어오르고 은은하게 부는 바람이 긴장을 누그러뜨려 준다. 마음 같아서는 잔디밭을 한 바퀴 돌며 휴식하고 싶지만 늦지 않게 회사에 복귀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됐던 옥사(중앙사, 11~12옥사, 9옥사)를 연달아 둘러보았다.
눕기도 힘들어 보이는 독방. 역사관 방문객들을 위한 배려인지 빛이 살짝 들어오게 해 두었음에도 독방 안에 직접 들어가면 심리적 압박이 느껴진다.
감방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도록 몇몇 방 문이 열려 있다. 창문이 있는 방이 대부분이지만 독방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게 창문이 막힌 구조였다. 빛을 차단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게 해 놓은 이 좁디 좁은 방들은 칠흑같이 어둡다 하여 ‘먹방’이라고도 불렸으며, 사람의 정신을 붕괴시키기로 악명이 높았다. 독방은 성인 한 사람이 편히 눕기도 힘들어 보일 정도로 좁다. 분명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불안감이 솟는다. 바닥 쪽에 작게 뚫린 구멍은 용변 처리용 구멍이다.

일반 감방은 독방보다 넓지만 이마저도 한 방에 4~50 명을 집어넣어 서로 부대껴야만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경험담이 나오는데, 잘 시간이 되면 사람을 쌓듯이 차곡차곡 누운 다음 수감자 중 힘 센 사람이 밀어 겨우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아이고, 갈비뼈 부러지겠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고. 이렇게 비인간적인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선인(先人)들의 의지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 심훈(1901~1936),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독립운동가들을 가두었던 9옥사.
옥사 건물 중 외벽에 큼직한 태극기가 붙어 있는 2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9옥사다. 다른 옥사들은 중앙 간수소와 붙어 있는 구조로 지어졌지만 9옥사는 분리돼 있다. 이 곳은 이른바 ‘사상범’, 즉 독립운동을 하다 잡힌 사람들을 따로 가두는 곳이었다. 건물 외벽 곳곳에 움푹 패인 흔적들이 보이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쏜 총탄 자국이라고 한다. 여러모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어두운 시기를 고스란히 담은 건물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추천하는 관람 동선 끝에 위치한 여(女)옥사도 9옥사처럼 분리된 곳이다. 이곳에 유관순 열사가 갇혀 지내던 8호 감방이 있다. 유 열사와 감옥 동기들이 옥중에서 부른 ‘8호 감방의 노래’는 지난 2019년 가수 안예은이 불러 주목을 받기도 했다.
수감자들이 운동하던 공간인 격벽장.
한센병사, 격벽장(수감자들의 야외 운동 공간. 좁고 긴 벽으로 분리해 수감자들끼리 소통할 수 없도록 차단), 추모공간 등을 쭉 둘러본 뒤 마침내 가장 가슴이 먹먹해지는 곳, 사형장으로 향했다. 사형장 앞에는 ‘통곡의 미루나무’라 불리는 큰 나무가 서 있었는데, 지난해 수명을 다하고 말라 죽었다. 1916년 전후 사형장을 만들 당시에 심었다는 이 나무는 사형수들이 붙들고 오열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형장 담장 안쪽에도 같은 시기에 심은 미루나무가 있었으나 한이 서려서인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역사관 측에서는 ‘통곡의 미루나무’와 똑같은 그루터기에서 자란 나무를 키워가고 있다.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안내판
통곡의 미루나무 옆으로 5m나 되는 높은 담장이 작은 목조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 건물이 바로 독립운동가 400여 명이 원통하게 희생된 사형장이다. 대낮이기는 하지만 서늘하게 비가 내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짧게 고개 숙여 묵념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사형장은 촬영 금지구역이다(아래 사진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에 공개된 사진임). 안을 들여다보니 교수형에 쓰이는 매듭 줄과 나무의자가 있고, 레버를 당기면 의자 밑 마룻바닥이 아래로 열리도록 되어 있다. 섬뜩하다. 건물 뒤쪽으로는 지하실(시신 수습공간)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노출돼 있다. 사형장 담장 뒤에는 사형 집행 후 시신을 형무소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일제가 설치한 시구문이 남아 있다. 몸에 고문 흔적이 심하거나 사형된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적 파장이 예상되는 인물일 경우, 시신을 인도받을 유족이 없는 경우에 이 터널을 통해 내보냈다고 한다.
사형장 건물. 사진=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시구문 터널. 사형 집행 후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사용한 통로다. 원래 길이는 약 200m에 달했으나 붕괴됐으며 현재는 40m 가 복원되었다. 사진=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초여름인데도 터널 안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냉기가 매섭다. 단순히 ‘무섭다’는 말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솟아난다. 내 나라 내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해도 어딘가로 끌려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임을 실감한다. 자유라는 이름의 이 행운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인생을 송두리째 던진 이름 모를 위인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솟았다.

역사관 전체를 꼼꼼히 둘러보기에 1시간은 다소 짧은 감이 있다. 수감자들이 노역에 동원되던 공작사, 현재 기념품 판매장소로 사용되는 취사장, 창고 등을 더 자세히 보려면 넉넉히 2시간은 잡아야 할 것 같다. 다음에는 여유로운 주말에,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역사관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는 여전히 비가 내렸다.

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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