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들보, 서까래 틀 뛰어넘은 한옥의 변신

동아일보
동아일보2021-06-24 09:00:01
공유하기 닫기
요즘 특정 일반명사 앞에 ‘케이(K)’자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K팝이라거나 K방역 등 주로 우리나라의 위상을 올리며 자부심을 드러내고자 할 때 사용된다. 이전에는 우리 고유의 생활양식이나 문화유산에 ‘한(韓)’자를 붙여서 구분하곤 했다. 한식, 한복, 한글 등등. 그 연장선상에서 한옥(韓屋)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실 예전엔 우리의 전통 주거양식을 한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집을 이르는 단어를 찾아보면 가사(家舍), 제택(第宅), 민가(民家) 등이 쓰였다. 지금은 너무 익숙한 주택(住宅)이라는 말도 없었다. ‘주택’은 일제강점기 이후, ‘한옥’도 집의 양식상 구분이 필요하던 시절이 되면서, 즉 외부 문화가 갑자기 태풍에 떠밀린 커다란 파도가 덮치듯 밀려 올 때 생긴 용어다.
박길룡이 설계한 민병옥 가옥. 현관을 만들고 화장실과 욕실을 내부에 넣고 긴 복도로 이은 평면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양식을 제안하는 시도였다. 임형남 대표 제공
19세기 말, 20세기 초 근대 무렵에, 서양인이 직접 가지고 들어왔거나 혹은 일본이나 중국인들을 통해 우회 수입되었던 서양 문물들 앞에 ‘양(洋)’자를 붙여서 구분했다. 서양의 음식은 양식(洋食), 의복은 양복(洋服), 버선은 양말(洋襪) 그리고 서양의 집은 양옥…. 그러고 보면 한옥이라는 단어는 그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우리나라 주거양식의 어떤 느낌도 특질도 들어 있지 않은, 그냥 서류 갈피에 붙어 있는 이름표처럼 무덤덤하기도 하고 무성의하기도 한 이름이다.

한때는 한옥이 낡고 완고한 집으로 여겨졌고, 모두 그 낮고 어두운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구습이라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나라에서도 꽤나 심혈을 기울였던 것 같다. 90년대 초 방영된 ‘사랑이 뭐길래’라는 주말 드라마가 큰 사랑을 받았다. 대발이와 지은이가 만나서 결혼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로, 캐릭터들도 개성이 넘치고 대조적인 두 사돈댁 배경이 재미를 더했다. 특히 한옥에 사는 완고하고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인 대발이 아버지와 산뜻한 양옥에 사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친절한 지은이 아버지의 대비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 오던 시기의 사회상이자, 한옥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 시대가 바뀌며 반대로 한옥은 모두 선망하는 집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정작 한옥이란 대체 어떤 집일까. 나무 기둥과 대들보와 도리와 서까래로 뼈대를 짜고 그 위에 기와를 얹은 집? 정서나 건강에 좋은 집? 사실 한옥을 하나의 유형이나 어떤 특정 시절의 집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한옥은 늘 성장하고 변화해 왔다.

가장 큰 변혁은 1930년대에 주로 이루어졌다. 박길룡(朴吉龍·1898∼1943)은 앞선 근대적 건축교육을 받은 건축가로 시인 이상이 건축가 김해경으로 일을 하던 시절, 그의 선임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종로 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근대식 빌딩을 설계했는데, 화신 백화점, 대학로 공업전습소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31번지의 2000년대 초반 모습. 분할된 필지에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한옥들이 들어섰다. 임형남 대표 제공
또한 박길룡은 한옥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었다. 경운동 수운회관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초입 예전에는 ‘민가다헌’이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가 지금은 민병옥가옥이라 불리는 집이 있다. 일제강점기 권세가였던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두 아들 민병옥과 민병완을 위해 같은 모양으로 나란히 지은 두 채의 주택 가운데 하나로, 또 다른 한 채는 월계동으로 옮겨지은 각심재다.

동향의 대문을 들어서면 ‘H자’형 본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대청을 한 칸 규모로 축소하고 별도의 응접실을 두었다. 현관을 만들고, 화장실과 욕실을 내부로 넣고 긴 복도로 이은 평면은 전통 주거에는 없던 구성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양식을 제안하고자 한 시도로써, 개량한옥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박길룡은 이후에도 주거에 대한 문화·개량·위생운동을 벌였다.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사람이 건축왕이라 불린 정세권(鄭世權·1888∼1966)으로, 기존 한옥의 단점을 개선하고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해 무척 획기적인 방식으로 부동산 개발을 한 사람이다. 서울 인구는 1920년대 이후 급속하게 늘어나 청계천 이남은 일본인을 위한 주거지가 많이 형성되었고 북쪽은 조선인을 위한 주거지가 개발되었다. 

그는 기존 한옥보다 위생적이고, 실용적이며 경제적인 집을 보급하겠다는 목표로 대지가 넓은 큰 땅을 여러 필지로 나누어 길을 내고 그 안에 ‘ㄷ자’나 ‘ㅁ자’ 도시형 한옥들을 넣었다. 2개의 방과 부엌, 유리문이 달린 마루를 놓고, 마당에는 화장실 위 장독대를 올렸다. 처마에 물받이 홈통을 다는 등 관리도 용이하게 했고, 입주 후 매달 집값을 나눠 내는 할부금융 방식으로 분양했다. 그는 조선인들을 위한 주거를 보급했을 뿐 아니라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 후원, 학교 건립과 기부에도 적극적이었다.

북촌한옥마을의 주요 골목인 가회동 31번지는 원래 민대식 소유의 땅이었다가 분할된 필지들에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한옥들이 들어서며 조성됐다. 이렇듯 한옥이란 오래도록 하나의 전형으로 고정되어 온 것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나 기호에 따라 진화하고 개량되며 계속 몸을 바꾸어 왔다.

간혹 영화나 인터넷을 보다 30, 40년 전 서울 사람들의 말투를 들어보면 지금과 무척 달라 놀라게 된다. 얼마 전 우리가 경험했던 시대인데도 그렇다. 말투가 계속 변하듯 집도 계속 변화한다. 간혹 한옥은 이래야 한다며 엄한 기준을 들이대는 사람도 있지만, 그 본질은 한국인이 구하기 용이한 재료로 한국의 기후에 맞게 개량하고 발전시킨 주거라는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