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의 상징 치마, 남자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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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2020-06-19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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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와 바지의 관계와 역사, 사람들의 사회 인식은 끊임없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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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최나래 기자] 다리 부분을 따로 만들지 않고 허리에 둘러입는 '치마'는 여성 옷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남자가 치마를 입고 밖에 나가면,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시선만으로 끝난다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래는 남자, 여자 구분 없이 치마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몇몇 나라의 전통의상에는 남자 용도 치마가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통으로 입는 치마가 바지보다 훨씬 만들기 쉽다. 그래서 바지보다 먼저 생겼고 남녀노소 입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로마 남성이 입은 옷인 토가 / 위키피디아
고대에는 남녀 상관없이 치마를 입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남녀 상관없이 치마 형태의 옷을 입었다. 물론 오늘날처럼 상·하의가 분리되는 옷은 아니다. 한 장의 넓은 천을 여미고 접는 형태로 입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위에 망토 형태의 겉옷을 입었다. 오늘날의 의복과 비교하면 비교적 종류와 디자인은 단순했고, 헐렁하면서 느슨한 형태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치마 패션은 중세 유럽으로 계승되어 사용된다. 치마는 온난한 기후에서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입었다. 카이사르는 저서 '갈리아 전쟁기'에서 켈트인들을 '수염을 깎지 않고 바지를 입는 야만인'이라고 묘사했고 본래 중국 한족의 한푸도 치마 형태였다. 어떻게 보면 바지는 당시 기준에서 야만인의 옷이었던 셈이다.

바지를 입은 게르만과 켈트족은 북방의 추운 지역에 살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한복도 기본적으로 북방 기마민족의 영향을 받아 남녀노소 상하의가 분리되는 형태였다. 한국의 기후도 북유럽처럼 추웠고 말을 타고 전투를 벌이려면 활동이 편리한 바지는 필수였다. 이처럼 바지는 기마민족 혹은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하지만 로마와 중국 문화권도 점점 바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유럽의 경우에는 북방의 추운 지역에 사는 게르만족, 켈트족 등이 입은 바지가 북쪽 지역에 주둔하는 로마군에게도 일부 전파됐다. 그리고 13세기부터 몽골과 투르크 등 아시아 국가에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유럽 복식에서 보편적으로 상하의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한족의 옷인 한푸를 입은 중국 젊은이들 / 위키피디아
바지를 다시 쟁취하게 된 여성들

시대가 바뀌면서 서양 남자들은 바지를 입게 됐으나, 여성들의 옷은 드레스(원피스) 형태로 변화해가며 치마 형태를 꾸준히 이어갔다. 근대에는 동서양 모두 여자는 치마 만을 입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서양에서는 여자가 바지를 입을 수 없다는 법적 조항까지 있었다.

여성이 바지를 입게 된 것은 19세기부터다. 1849년 미국의 여성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가 처음으로 헐렁한 여성용 바지인 '블루머(bloomers)'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자전거가 보급되고 여성들의 자전거 사용이 늘자 불편한 치마 대신 여성들은 블루머 바지를 애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편견과 반발도 끊이지 않았다.
블루머 바지 / 위키피디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례 없는 전쟁의 수요로 인해 여자들도 대거 노동에 투입됐다. 기존 여자들의 치마는 노동에는 취약해 편리한 바지를 입기 시작한다. 이렇게 여성의 역할이 늘어나고 여성운동이 일어나면서 점차 바지를 쟁취하게 됐다.

물론 여성들은 여전히 치마를 입었다. 상하의가 분리되면서 스커트(skirt) 형태의 하의가 나오기 시작했고 롱 스커트, 미니스커트, 멜빵 치마, 원피스 등 다양하게 디자인되어 현대의 패션을 선도했다. 여성들은 남자의 상징인 바지를 쟁취하면서도 치마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몸빼바지 / 위키피디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바지를 입은 것은 스스로의 쟁취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여성들은 '몸빼바지'(일바지)를 입게 된다. 몸빼 바지는 현재도 작업용으로 좋아 농촌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이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한복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식 몸빼를 남녀 상관없이 입도록 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바지는 자연스럽게 여성 패션으로도 자리 잡게된다.

이후 가수 윤복희가 1967년에 미니스커트를 처음 입었고, 이 미니스커트가 조신해야 할 여성의 복장을 문란하게 한다며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윽고 군사정권에서 미니스커트를 규제했고 미니스커트는 우리나라에서 여성해방과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킬트를 입은 스코틀랜드 남성 / pixabay
남자들이 입는 전통 치마들, 스코틀랜드의 '킬트'

여전히 현대에도 이어오는 남자들이 입는 치마 형태의 전통 의상이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을 들자면 스코틀랜드의 킬트(kilt)를 들 수 있다. 킬트는 허리에서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 하의 형태이며, 독특한 타탄(tartan)이라는 체크무늬로 장식됐다. 현재도 스코틀랜드에서 일상적으로 입는 옷이다.

타탄은 각 씨족에서 색깔을 정해 사용했다. 이것으로 적군과 아군을 구분했고, 계급을 구분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 점차 외국 디자이너들도 이 킬트의 문양에 흥미를 느껴 다양하게 디자인했고, 전통적으로 양모를 쓰던 것에서 벗어나 면 등 다양한 소재를 쓰고 체크의 크기와 색깔이 다양해졌다.

전통적으로 킬트는 양모를 능직(날실과 씨실을 두 올 이상 건너뛰어 비스듬하게 교차시킴)으로 짜고 염색을 했으며, 천 주름이 같은 방향으로 잡아 핀으로 여몄다. 또한 양말은 긴 면양말을 신었다. 타탄 무늬는 3~4가지 색깔에 2중, 3중으로 바둑판같이 엇갈리게 배치한다.

하지만 킬트의 형태가 꼭 정해진 것은 아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킬트가 꼭 그렇게 자주 입은 옷은 아니었다. 킬트가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된 것은 18세기이다.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의 반영 감정을 꺾기 위해 이 킬트를 금지시키자, 순식간에 킬트는 스코틀랜드의 민족적 자존심으로 퍼져나갔다.
미얀마 론지 / 위키피디아
남아시아 나라들도 치마를 입는다

미얀마의 전통 의상인 론지(longyi)도 치마 형태의 옷으로 남녀 구분없이 누구나 입는다. 더운 동남아시아에서는 사실 치마 형태의 옷이 많았는데, 개혁개방이 상대적으로 늦은 미얀마에 가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론지를 일상적으로 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학생의 교복에도 론지가 쓰인다.

남자 옷은 파소라고도 하며, 원통형의 천의 양 끝을 가운데로 모아 묶는다. 여자 옷은 트메인이라고 하며, 직사각형의 천 형태를 입고 천 양 끝에 있는 끈을 허리에 묶는다. 사용하는 재질은 상류층은 비단을 애용했으나, 서민들은 시원한 면을 사용했다.

인도 남부와 방글라데시에서 남자들은 전통의상인 룽기(lungi)를 입었다. 룽기는 허리에 둘러 매듭을 짓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하의 치마 형태이다. 주로 면으로 만들었지만, 행사와 의식 등에서는 비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색깔은 단색 혹은 체크무늬를 사용했는데, 특히 파란색을 많이 사용한다.

체크무늬는 인도의 '마드라스 체크'를 사용했는데, 마드라스 체크는 킬트의 타탄체크와 함께 전통 체크무늬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알록달록 다양한 색감과 격자, 줄무늬가 특징이다. 한편 인도인과 미얀마인 남자들은 이렇게 긴 치마를 입었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룽기를 입은 인도 남성 / www.wallpaperflare
오늘날 치마는 여성성의 상징이자 전유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동안의 역사를 보면 남자가 치마를 입었던 기간도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남자가 치마를 입는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오늘날에도 남자가 치마를 입는 곳이 많다.

사회의 인식은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것이 진실도 아니다. 남자가 치마를 입으면 안 된다는 것도 별다른 근거 없는 대중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 시대가 흐르면 남자도 다시 치마를 입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