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선조들이 식후 커피 대신 마셨던 전통음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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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2020-04-23 09:4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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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우리나라의 전통음료 하면 식혜나 수정과 등이 떠오른다. 달달하고 시원하여 입을 개운하게 해주니, 식사 후에 마시면 좋다. 현대인들이 식사 후에 마시는 커피라든가, 맵거나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에 마시는 콜라 등의 역할을 이들이 대신해준 것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마셔온 '차'도 음료의 한 형태에 속한다. 하지만 대부분 차는 끓인 물을 이용해 만들고 다도 등 예절을 갖추고 조금씩 마시는 의미가 더 강하다. 하지만 차에서도 매실차, 오미자차처럼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한 미숫가루처럼 음료이면서 식사대용으로 사용된 것도 있다.

물론 오늘날처럼 음료수, 술, 음식, 디저트의 개념이 명확히 구분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상들이 식후에 격식 없이 입가심용으로 마셨던 전통 음료가 몇 가지 있었는데, 이들 전통 음료는 아주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후식 문화로 정착됐다. 특히 이들 음료는 오늘날 과학적 연구를 통해 모두 천연 소화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잣을 띠운 수정과 / 위키피디아
귀한 재료를 사용한 고급 음료, 수정과

수정과(水正果)는 식혜 다음으로 잘 알려진 전통음료이지만, 이 음료는 사실 굉장히 귀한 음료로, 예전에는 서민들이 구경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수정과의 재료인 계피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귀한 향신료이기 때문이다. 수정과는 계피와 생강을 끓인 물을 식히고 꿀이나 조청을 섞고 잣, 곶감을 넣어 마셨다.

1795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보면 20가지 이상의 수정과가 잔칫상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에는 수정과가 국물이 있는 정과, 즉 전통 음료와 화채를 모두 지칭하는 의미로도 쓰였다. 또한 계피 외에도 오미자, 복분자, 배 등 다양한 재료를 넣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배로 만든 수정과는 '배숙(─熟)'이라고 불렀다. 배숙은 생강을 넣고 끓인 물에 통후추를 박아 넣고 예쁘게 자른 배조각, 꿀, 설탕 등을 함께 넣어 다시 끓인다. 배숙도 역시 후추 등 비싼 재료를 사용한 탓에 궁중에서만 마실 수 있는 음료였다.

근대 이후에는 만들기 간편하고 맛도 좋아 설날에 식혜와 함께 만들어 마신 대표 음료수가 되었다. 맵고 따뜻한 성질을 가진 생강과 계피 덕분에 손발과 장기를 따뜻하게 보호하는데, 특히 장 활동을 원활하게 하여 소화를 돕고 면역력을 키워준다고 알려져 있다.
돌솥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든 숭늉 /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우리나라에서만 마셨던 고유한 음료, 숭늉

숭늉은 옛날 서민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마셔온 구수한 음료라고 할 수 있다. 부엌에서 밥을 짓고 남은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바로 마실 수 있는 간편함과 별다른 재료가 필요 없다는 점, 자연스럽게 솥을 씻을 수 있다는 점 덕분이다.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숭늉을 마시는 과정은 우리 고유한 문화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로 인해 차 문화가 쇠퇴하고 숭늉 문화가 더욱 발달하게 되었는데 일본과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음료였다. 중국은 물을 풍부하게 넣어 끓이다가 다시 퍼내고, 약한 불로 뜸을 들여 물렁한 형태로 밥을 지었다. 일본은 우리처럼 아궁이, 온돌이 붙어있지 않았고, 큰 무쇠솥을 쓰지 않았기에 굳이 숭늉을 만들어 먹지 않았다.

12세기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경은 '고려도경'이란 책에서 고려인들은 숭늉을 가지고 다니며 마신다고 신기해했다. 실제로 숭늉은 밥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죽 형태가 되기에, 식사 대용으로도 언제든지 간편하게 가지고 다니며 먹을 수 있다. 아울러 누룽지와 숭늉에는 녹말이 자연스럽게 분해되면서 소화를 촉진하는 덱스트린이 풍부하게 생겨난다.

숭늉은 점차 무쇠솥 대신 양은솥, 전기밥솥이 사용되면서, 현대인들에게 잊혀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누룽지와 숭늉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일부 밥솥 제품에는 누룽지 기능이 추가되거나, 숭늉과 누룽지를 이용한 과자와 탕, 라면, 막걸리 등이 개발되어 꾸준히 상품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식혜 / 위키피디아
젊은 세대도 좋아하는 대중적인 전통음료, 식혜

식혜는 멥쌀, 찹쌀 등으로 된밥을 짓고, 엿기름이 든 물에 함께 풀어 넣는다. 이후에 엿기름의 효소가 발효가 되는데, 이것을 충분히 끓이고 다시 식히면 마실 수 있다. 밥알은 효소에 의해 둥둥 뜨고, 엿기름에서 나오는 아밀라아제가 밥의 탄수화물을 당으로 분해시켜 맛을 달게 해준다. 이 아밀라아제는 또한 소화를 돕는 역할을 한다.

식혜는 오늘날 젊은 세대도 좋아하고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이다. 식혜는 다른 전통 음료보다 SNS 태그 등이 몇 배는 더 많다. 단맛과 입가심에 좋은 시원함 덕분에 현대인에게도 꾸준히 사랑받는 것 같다. 특히 대기업에서 대량생산하는 캔식혜는 식혜의 인기를 꾸준히 이어가게 한 일등공신이다.

다만 대기업 식혜는 설탕과 여러 첨가제를 많이 넣었으므로, 기존 식혜와는 맛이 조금 다르다. 할머니가 만들어주거나 몇몇 가게에서 구할 수 있는 수제 식혜랑 비교하면 분명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변화로도 볼 수 있겠다. 집에서 직접 식혜를 담가보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대기업과 수제 식혜가 양분된 것과 별개로 이미 식혜의 종류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식혜 제조 과정에서 단호박을 첨가하면 노란 단호박 식혜가 되고, 고구마를 넣으면 자색의 고구마 식혜가 된다. 다양하게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게 활용이 가능 한 것, 그것이 바로 식혜의 매력인 것이다. 또한 안동 지역에서 마신 '안동식혜'는 고춧가루를 넣어 빨갛다는 특징이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다른 식혜와 구분되는 차이가 있다.
안동식혜 / 위키피디아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담겼던 전통 음료들

우리나라는 차 문화 일변도였던 중국, 일본과 달리 식혜, 수정과, 숭늉같이 다양한 음료를 식후에 마셨다. 오늘에야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이들 음료의 성분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조상들은 이들 음료가 식사 후 소화를 잘 도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숭늉은 서민들이 많이 먹었으며, 한국인에게 가장 보편적인 음료였다. 한편 수정과는 궁중에서 주로 마신 고급스러운 음료였으며, 그리고 그 중간에는 식혜가 있다. 이 음료를 각각 먹는 계층은 조금씩 달랐지만, 전부 우리 고유한 전통 음료 문화였고 조상들 삶의 지혜였다.

아궁이와 온돌, 거대한 무쇠솥을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시게 된 숭늉은 현대에 전기밥솥이 생기자 다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커피가 꿰찼다. 그리고 다른 전통음료들도 콜라와 사이다 등의 청량음료가 대체하고 있다. 그나마 식혜가 대중적인 음료로서의 지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커피의 카페인 성분이 사실 소화에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한다. 콜라와 사이다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에 따라 각 문화의 지위와 쓰임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현대의 우리는 건강하지 못하면서 너무 자극적인 맛에만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싶다. 일상 속에서 활용된 조상들의 슬기로움에서 다시 배울 수는 없을지 조금은 아쉬운 마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