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인플루언서 ‘초식마녀’ 박지혜 "비난 각오하고..."

신동아
신동아2021-02-11 08: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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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이 올해부터 채식주의자 병사에게 육류를 배제한 식단을 제공하기로 했다. 스포츠계에서도 채식 선언을 하는 선수가 늘고 있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노경은이 대표적이다.

2019년 한국채식연합(KVU) 추산에 따르면 국내 채식 인구는 150만 명에 달한다. 2008년에 비해 10배 늘어난 수치다. 이제 비건은 '유별난 식성을 가진 독특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진=오홍석 기자
‘초식마녀’ 박지혜 씨는 비건 커뮤니티에서 알아주는 인플루언서(influencer)다.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을 통해 구독자들과 소통한다.

가끔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 때는 비건이 아닌 시청자의 참여도 적극 독려한다. SNS에는 비건 생활을 담은 만화와 영상, 레시피(조리법)를 주로 올린다. 최근 비건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져 구독자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맛있는 채식생활’을 콘셉트로 한 레시피 영상은 따라 하기가 쉬워 특히 인기가 많다. 일상생활과 레시피를 담은 만화를 엮어 ‘오늘 조금 더 비건’이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비거니즘(veganism): 동물 착취와 학대를 최소화하려는 삶의 방식
비건: 비거니즘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

비건들은 식습관뿐만 아니라 의복, 화장품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제품에서 동물성 재료를 피하려 노력한다. 우유를 마시는 것이 살생은 아니지만, 동물 학대 논란을 고려해 두유로 대체한다. 각종 과자와 라면을 튀기는 데 쓰이는 팜유도 오랑우탄 서식지를 해친다는 이유로 사용을 자제한다.
- 흔히 비건은 샐러드만 먹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평소에 뭘 먹는지 궁금하다.

“샐러드는 잘 안 먹는다. 익히지 않은 차가운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비건 요리라고 해서 특별한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일상에서 먹는 요리 대부분을 비건 방식으로 조리해 먹을 수 있다. 탕, 전골, 국 같은 뜨끈한 국물 요리를 좋아한다. 특히 들깨미역국에 두부를 넣어 먹을 때 행복하다. 비빔국수나 비빔밥 위에 구운 채소를 가득 올려 간장과 들기름으로 양념하면 재료가 잘 어우러져 채소의 맛이 살아난다.”

- 비건이 되면서 삶의 어떤 부분이 달라졌나.

“비건의 핵심 키워드는 ‘연결’이다. 비건이 되면서 내가 선택한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이 직간접적으로 지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관심을 갖게 됐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 비건이 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관심사가 식탁 밖으로까지 나아갔다.”

- 답변이 철학적으로 들린다.


“누구나 사는 게 팍팍하지 않은가. 먹고사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를 축소하게 된다. 우주의 먼지처럼 말이다. 그러다 ‘나 오늘 너무 힘들었으니까 힐링을 위한 치킨 한 마리 시켜 먹어야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과거에는 무심했지만 비건이 되면서 그 치킨이 밥상에 올라오기까지 자연과 동물의 희생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됐다. 개인의 작은 선택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됐다.”

- 식습관을 넘어 생활에서도 비거니즘을 실천하나.

“먹는 것, 입는 것, 바르는 것 모두 동물성이 들어간 제품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비건이 되기 전부터 옷은 빈티지(구제)를 좋아했다. 빈티지를 고집하는 이유는 패스트패션이 환경에 끼치는 피해가 엄청나서다. 환경을 지키고 싶다면 이미 생산된 상품을 다시 소비하는 빈티지를 추천한다.”

패스트패션은 의류를 빠른 주기로 대량생산해 저가에 판매한다. SPA라고도 한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설립된 유엔 산하 국제 협의체 IPCC에 따르면 의류 생산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한다. 연간 물 1조5000억t 사용, 화학약품 배출, 미세 플라스틱 양산 등의 문제도 지적된다.
비난받을 각오 하고 비거니즘 알리려는 이유
- 만화를 그리고 글을 쓰고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일은 모두 품이 많이 든다. 직장도 다녀 바쁠 텐데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

“만화가가 되고 싶었기에 일상을 담은 만화를 그려왔다. 비건이 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비건으로 사는 내 일상을 그리게 됐다. 먹는 걸 좋아하는 터라 비건이 되기로 결심하자마자 많은 레시피가 떠올랐다. 내가 요리한 레시피를 기록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또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레시피를 공유하기 위해서도 그렸다. 그렇게 열심히 그리다 보니 어느새 분량이 쌓여 책도 내게 됐다.”

- 비거니즘은 혼자 실천하면 그만인 것 아닌가. 가치를 알리거나 권하는 일로 자칫 미움을 살 수도 있다. 온라인에는 비거니즘에 대한 악플도 적지 않다. 굳이 비거니즘을 널리 알리려는 이유가 있나.

“비거니즘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피해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인 데 있는 것 같다. ‘네 일도 아닌데 왜 나한테 참견이냐’는 식의 비난이다. 하루에도 엄청난 수의 동물이 죽어가는 긴급한 상황인데 욕먹기 싫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사람이 나서길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만화를 그릴 수 있고 서툴지만 영상 편집도 할 수 있으니 그것부터 시작했다. ‘초식마녀’라는 이름도 중세시대 마녀사냥에서 따왔다. 비난을 감수할 각오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 한국에서도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 관심이 커졌음을 체감하는지 궁금하다.

“비건을 시작한 지 2년이 됐다. 그 2년 사이에도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비거니즘에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비건 시장이 확실히 커졌다. 비건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올리기 시작한 후 평범한 일상 만화를 그릴 때보다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훨씬 더 빨리 늘었다.

코로나19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육식으로 인한 야생동물 서식지 파괴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환경보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비거니즘으로 옮겨오는 것 같다.”

- 비거니즘이 추구하는 가치에는 동감하지만 막상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비건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면 쉬운 일부터 실천해 나가면 된다. 비거니즘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 좋겠다. 식습관을 바꾸기 어렵다면 입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 마지막으로 비건에 대한 편견 하나만 깨달라.

“비건이 제한적이고, 금욕적이고, 참는다는 편견이 있다. 비건들도 맛있는 걸 먹으면서 즐겁게 산다. 나도 비건이 되기 전에는 닭, 소, 돼지를 돌림노래처럼 번갈아 가면서 먹었다. 비건이 되면서 제철 채소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비건이 아니었으면 먹지 않았을 식재료도 사 먹는다. 미식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비거니즘은 제한이 아니라 확장이다. 더불어 비거니즘을 실천한다고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다. 영양실조 걱정 안 하셔도 된다.”

오홍석 기자 lumiere@donga.com